드라마 내용에 대한 잡담은 아니지만, 이번 드라마를 계기로 경증 자폐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으면 하는 마음에 써봐.
이번에 우영우 드라마 보면서 우영우의 행동이 너무 공감되고 너무 기뻤어.
나와 같은 사람이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나온다는 게 너무 설레.
그리고... 이런 사람이 생각보다 정말 많다는 게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어.
나는 우영우보다도 훨씬 더 경증 자폐...라고 볼 수 있어. 30살 되어서 대학병원 가서 상담을 했지만, 사실상 '자폐 진단'을 내리기엔 너무 애매하다고 했어.
아이큐가 높은 편이고 (상위 1~2%) 어쩌면 그 때문에 후천적인 학습으로 습득한 게 너무 많았을 걸로 추정되고, 그렇기에 증상으로 드러나는 건 거의 없어.
그래서 진단을 받지는 못했어.
하지만 어릴 적엔 자폐 증상을 보였던 건 확실해.
생후 6개월에 처음 '엄마', '아빠'를 말했는데, 그 이후로 28개월까지 그 외의 단어를 전혀 말하지 않았대.
사람들과 눈맞춤도 잘 안 하고, 나를 부르는 소리에 잘 반응하지도 않았대.
그런데 28개월에 갑자기 말을 했다는 거야. 그것도 완벽한 문장으로.
당시 엄마가 내 동생을 낳고 병원에 입원 중이었는데... 내가 가서 '엄마 많이 아파? 내 동생 낳느라 고생했어' 뭐 이런 식으로 말을 했대
그래서 엄마도 주변 사람들도 너무 놀라고 그랬대.
하지만 그 이후에 또 입을 꾹 다물었대. 그러다 내가 필요할 때만 말을 하는 식이었고.
내가 5-6살 즈음일 때 일이야.
나는 장난감으로 혼자 놀고 있었고
부모님과 친척들은 옆에서 진지하게 이야기중이었어.
한 친척이 나한테 'ㅇㅇ아 몇살이지? 노는 거 재미있어?'라고 물어봤는데 내가 대답을 안 했어.
그 질문을 다 듣긴 들었어. 그런데 대답할 필요를 못 느꼈다고 해야 하나.. 답을 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하고 듣기만 했어.
그 사람이 내가 몇살인지 알고 있는 걸 나는 알았어. 그리고 내가 노는 게 재미있다는 정보를 저 사람에게 전달할 필요를 전혀 못 느꼈어. 그래서 그냥 무시하고 놀았어.
그러고 있으니까 사람들이
'애가 자폐 증상 있는 거 아니냐, 검사 받아봐야 하는 거 아니냐' 그렇게 말을 하더라고.
난 그분들이 나누는 말을 다 듣고 있었고, 그때의 풍경을 생생하게 다 기억해. 빨간색 자동차 장난감을 오른손에 쥐고 있었던 상황까지 전부...
그 순간 나는 깨달았어.
'누군가가 질문할 때 대답을 해야 하는 거구나. 그러지 않으면 뭔가 문제가 생길 것 같다, 뭔가 위험하고 잘못되고 있다'
그걸 느낀 이후로 사람들이 질문하면 대답하려고 노력했어.
한 번에 쉽게 되지는 않았어.
나는 사람들의 말이 '입력'은 되는데, '해석'이 바로 되지는 않았거든...
누군가가 나한테 말을 걸면, 말을 거는구나. 그냥 그 자극을 그대로 입력만 하는 거야.
그러다가 문득 생각하는 거지. '아, 방금 저 사람이 한 행동이 나한테 말을 거는 거였다!' < 이 사실 자체를 되게 늦게 깨달아.
일부러 노력하지 않으면 상대의 행동의 의미를 바로 해석하지를 않고 그냥 '입력'만 하게 되거든.
나중에야 '아차!' 하고, 아까 내가 보고 들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떠올리고 그에 대한 대응을 하는 거야.
설명이 너무 장황해졌는데^^;;
보통 사람들도 인강 들으면서 가끔 딴 생각 하며 강의 내용을 놓치기도 하잖아. 그거랑 비슷하다 보면 돼.
나는 한 번 보고 들은 건 그대로 입력이 되기 때문에 머릿속에서 '뒤로가기'를 해서 '재생'을 할 수 있거든.
그래서 딴 생각 하느라 놓친 상대의 말을 다시 머릿속에서 재생하고, 해석하고, 반응하는 거야.
가끔은 여전히 상대의 말을 씹기도 하고, 혹은 아주 늦게 대답하기도 했지만, 얼추 상호작용이란 걸 하기 시작했어.
우리집은 많이 가난했기 때문에 자폐 진단을 받으러 병원에 갈 여유가 없었어.
그런데 내가 어느 시점부터 곧잘 사람들의 말에 반응을 하니까 부모님은 '우선 지켜보자' 하게 됐대.
그리고 초등학교에 간 나는 시험 점수 만점을 놓치지 않았어.
나는 자연스럽게 '머리 좋은 괴짜' 정도로 사람들에게 이해되었어.
나는 내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직감적으로 항상 알고 있었어.
아스퍼거라는 진단명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도 전혀 몰랐고, 남들은 내가 자폐아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냥 나는 내가 뭔가가 다르다는 걸 알았어.
그래서 스스로 엄청 노력했던 것 같아.
소설책을 정말 많이 읽고, 드라마를 보고, 영화를 보고,
교실에서 친구들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암기했어.
맨날 '멍 때리는 바보'라고 불렸지만... 멍때린다는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
남들은 내가 멍때린다고 생각할 때 나는 교실 내의 모든 대화를 하나하나 듣고 입력하곤 했어.
그러다 조금 자신감이 생기면 대화에 끼어들기도 했어. 자연스럽게 되진 않았어. '또 실패네' 라고 생각하고, 다시 멍때리며 친구들을 지켜보고.
내게 학창시절은 정말 지옥 그 자체였어.
사람들은 내가 바보 같고 둔하다고 생각한 것 같아.
그리고, 바보 같고 둔한 사람은 '감정도 무딜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내가 약간 로봇처럼, 기계처럼 행동하는 면이 있었어. 그렇다고 내 감정까지 로봇이진 않았어.
하지만 많은 친구들은 내가 감정이 있다는 걸 자주 잊어버리는 것 같더라고. 그게 더없이 사무치게 외로웠어.
내가 타인의 감정을 즉각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나 스스로 감정이 아예 없는 건 절대 아니기 때문에,
특별히 집중해서 노력하면 타인의 감정을 추측할 수 있어.
내가 마치 그 사람이 된 것처럼, 그 사람이 보고 들었을 풍경을 그대로 재현해서 상상하면 돼.
이게 쉽지는 않아서... 당시엔 적어도 1분에서 5분 정도는 걸렸던 것 같아.
누군가가 '쟤가 나한테 욕을 했다'라고 말을 하면
나는 그 애 입장에서 그 사람이 나한테 그 욕을 하는 장면을 상상하고 몰입하려고 엄청 노력해. 그러면 나 스스로 분노가 저절로 느껴져. 그 뒤에 '아 쟤가 분노했구나'를 알 수 있어.
하지만 대화 중에 '아 잠시만, 내가 너의 감정을 잠시 느껴볼게' 라고 말할 순 없는 노릇이잖아?
내가 즉각적으로 '와 열받았겠다'라고 반응하지 않고 멍때리고 있으면
상대방이 얼마나 답답하고 어이없을지 잘 알아... 그래서 정말 힘들었어.
지금 나는 누구도 자폐라고 생각하지 않아.
친한 친구들한테 '나 어릴 때 자폐 의심 받았대' 라고 하면 모두 안 믿어.
워낙 경미한 수준이었던 데다, 스스로 말하긴 부끄럽지만 지능이 높았고, 스스로 문제를 인식해서 해결하려고 긴 시간 노력을 했기 때문에 티가 안 나.
하지만 나는 정말 죽도록 노력했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30대 중반인 지금 내 직업은 놀랍게도 상담가야.
어릴 적 대인관계로 너무 힘들어했고, 긴 시간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앓았고 자살시도도 수차례 있었어.
그 경험을 통해 뒤늦게 상담 쪽으로 진로를 잡게 됐어.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아스퍼거 증후군을 처음 알게 됐고,
자폐가 '자폐다/아니다'로 나뉘는 게 아니라 아주 넓고 너무도 다양한 스펙트럼이란 걸 알게 됐고,
지금은 장애에 준하는 진단명을 받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신경전형인(=일반인)과는 다소 다른 경향성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어.
글을 너무 길게 써버리고 말았는데, 짧게 요약하자면.
이런 사람도 있다는 게 많이 알려지면 좋겠어.
나는 외향적이고 활발하다는 소리를 듣고, 상담도 평균에 비해 습득이 빠른 편이어서 늦은 나이에 시작한 것 치고는 괜찮게 하고 있어.
이런 나도 어떤 지점에서는 자폐 스펙트럼 안에 있다고 볼 수 있어. '자폐 스펙트럼 진단'을 땅땅! 내리기엔 애매한 지점이 있다고는 하지만...
아스퍼거 증후군 진단을 정식으로 받은 사람들 중에 특히 여성들은, 후천적으로 사회성을 상당히 훈련한 경우가 많아. 그래서 겉으로 티가 안나는 경우가 많은 편이야.
그러니 혹시나 누군가가 이해하기 힘든 언행을 한다면,
혹시 이 사람도 주류와는 다른 사고회로를 가진 건 아닐까 생각해주면 좋겠어.
그런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 오해 속에서 살아가야 해.
중증도의 자폐도 있지만, 일상생활이 충분히 가능한 자폐도 존재해. 자폐는 너~무나도 다양한 스펙트럼이야.
그리고 또 중요한 다른 한 가지... 자폐인도 감정이 있다는 것. 상처 받을 줄 안다는 것.
이런 점들이 널리 알려지면 참 좋겠다.
긴 글 읽어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