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박경리 작가님과 도올 선생이 일본에 대해 나눈 대화 올라온 거 보고 관심이 생겨서
네네24 토지 페이백으로 <일본산고>를 구매했는데 너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함! 꼭 읽어보길 추천해.
미출판된 원고들을 작가님 사후에 책으로 엮은 건데 별로 길지도 않고 글이 워낙 흡인력 있어서 금방 읽을 수 있어.
책 전체에 밑줄 긋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고 토리들과 공유하고 싶은 부분만 골라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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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요즘 일본에 관하여 거론한다는 자체가 일부 참신한 지식인들 귀에는 사양의 만가(挽歌)쯤으로 들리는 모양이고 민족주의자의 촌스러운 몸짓으로 보이는 모양인데 그것은 과거 강자(强者)의 논리가 아직 건재해 있음을 의미한다.
- 여하튼 이른바 새로운 친일인사에게 민족주의의 극복, 세계주의 표방 같은 것은 빌려 입기에 그보다 지적이며 안성맞춤의 것이 달리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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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바로 그러했기 때문에 기능과 세기(細技)가 우수하면서도 일본은 항상 남의 틀과 본을 훔쳐오거나 얻어 와서 갈고 닦고
할밖에 없었다. 본과 틀이 없는 나라, 그들의 정치이념은 창조의 활력이 위축된 민족을 만들었던 것이다. 오늘이라고 다를 것이
없다.
- 자살은 일본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용감한 사람만이 자살하는 것도 아니다. 흉악한 범죄자도 자살하고
천하의 독부(毒婦)도 자살하고 삶을 이길 수 없는 무력한 사람도 자살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고통이 적은 방법을 취하는 것이
본능이다. 추악하고 잔혹하고 야만적인 그 자살 방법에 일본은 그야말로 긴란[金襴], 돈수[緞子], 비단을 휘감아서 미화하고 일본
정신의 표본으로 자랑한다.
- 일본의 팽창주의는 과거와 다를 것이 없다. 그 해악도 다를 것이 없다.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 혹은 무관심을 나타내는 일부 지식층의 이상주의 혹은 지성을 나는 지적 허영으로 본다. 토지의 일본인 오가타
지로[緖方次郞]는 코스모폴리탄이다. 그는 강자 편에서, 가해자 편에서 양심을 지켜 비판하는 세계주의자다. 그러나 피해자가 불이익을
안고 과연 평등의 세계주의로 갈 수 있는 걸까? 허구요 망상이다. 한국인의 반일이 모두 그런 논리에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분풀이라는 본능적 감정인 것도 인정한다. 그러나 정치적 차원이지만 일본인의 의식도 간과할 수 없는 만큼 일본은 왈가왈부할 처지가 못
된다. 그것은 과거의 잘못보다 오늘의 잘못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국인의 분을 풀어주지 않았다.
물질로 환산할 수 없는 피해였지만 그들은 거의 보상하지 않았다.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통분이 무슨 사과인가? 그러고도 욕을 안 먹겠다는 것은 뻔뻔스런 일이다.
- 왜 하필 일본에 핵폭탄이 떨어졌는가. 그 원인을 그들은 말하지 않는다.
남경의 30만 양민 학살에 대해서도 그들은 말하지 않는다. 아니, 말한 적은 있었다. 한때 소설을 썼고 정치가로 변신한
이시하라[石原]라는 위인이 외국 기자에게 남경 사건은 조작된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어디 남경 학살뿐이랴. 그러나 그 비행을
일일이 거론하는 것에 사실 우리는 지쳐버렸고 힐난하는 처지에서도 차마 입에 담기 부끄러운 사건들, 하지만 그들은 거론하는 데 지친
것도 아니며 부끄러워서 침묵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열심인 것은 원폭의 기념탑을 세우고 공원을 조성하고 그들 자신이 피해자임을 세계만방에 고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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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은 물리적으로 육신을 구속하고 현인신은 정신을 사로잡고, 이같이 옥죄이는 공간을 상상해볼 것 같으면 참 이상하다. 괴기한
것들이 떠오르니 말이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이 있고 손바닥만 한 연못에는 성냥개비 같은 다리가 걸려 있고 생명을 일그러뜨린
분재가 보이고 세련된 포장, 장 종지 같은 작은 술잔, 손가락 끝에서 노는 앙증스런 우산 하며, 기능으로 갈고 닦으며 달려온
역사의 비극을 소름 끼치게 느끼게 한다. 비상을 꿈꿀 수 없는 사로잡힌 영혼에게 깃드는 것이 허무주의다. 그리고 쾌락이다. 남경 학살, 백주의 난행은 일본군의 전략이지만 뒤집어 보면 그로테스크와 에로티시즘의 여실한 참극, 절망 없이 그 짓을 했을까.
일본 문학에서 탐미주의가 정점을 이루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썩어가는 육체, 괴기스러움에 대한 쾌락,
그것은 일종의 도피다. 자살의 미학도 실은 일그러진 사디즘을 포장해낸 것에 불과하고 삶을 정면 돌파하려는 의지의 결여로 볼 수
있다. 산다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 또 아름다운 것도 없다. 진실 자체이기 때문이다. 진실의 추구야말로 문화의 시발점인 동시, 발전의 과정이기도 하다.
- 물론 학생들이 일본을 모른다는 것이 학생들의 잘못은 아닙니다마는 마지막 꼭 해두고 싶은 말은 결코 일본을 모델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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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도 그렇고 인간사도 그렇고 괴기스러움이 횡행하여 별의별 일들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사고력은 마비되어 무의미해진 시간이
마구잡이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비판 없이, 숫제 생각 없이 일본을 닮아가는 것이 문제지요. 그러나 그보다 경제대국이라 하여 그
문화까지 격상하고 무한한 동경과 찬사를 아끼지 않는 줏대 없는 식자가 날로 늘어나는 현실이 걱정입니다.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일본의 군비 확장은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일본인을 포함한 인류의 적신호입니다.
(아래는 일본의 한국학 학자 다나카 아키라가 쓴 "한국인의 '통속민족주의'에 실망합니다'라는 글에 "일본인은 한국인에게 충고할 자격이 없다"라는 제목으로 쓰신 반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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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일부 지각없는 사람들이 우쭐해서 과잉 표현을 좀 했다 하자. 그들의 천진한 자랑 때문에 일본의 땅 한 치 손실을 보았는가,
금화(金貨) 한 닢이 없어졌는가, 왜 그렇게 못 견뎌 할까. 그 같은 자랑조차 피해로 받아들이는 그들이고 보면 우리 한국의
천문학적 물심양면의 피해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안이 벙벙해진다.
- 거칠 것 없이 남의 팔다리 잘라놓고 뼈
마디마디 다 분질러놓고 제 자신의 새끼손가락에서 피 한 방울 흐르는 것을 보는 순간 새파랗게 질리면서 “아파! 아파!” 하고
울부짖는 형국이다. 맙소사, 이런 정도를 못 견디어 하는 증상의 원인은 대체 무엇일까.
생각건대, “한 시절 전만
해도 조선인은 우리 앞에 우마(牛馬)나 다름없는 존재 아니었나. 이제 와서 제법 사람 노릇 한다. 도저히 보아줄 수 없군.” 그런
불쾌감도 있었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우리에게서 문화를 조금씩 빌려 갔었던 무지하고 가난했던 왕사(往事)로 하여 사무쳐 있던
열등감 탓은 아닐까. 한국의 잘못된 점에 대해서는 신이 나서 발 벗고 나서서 떠들어대지만 좋은 것에 대해서는, 특히
문화 면에서는 애써 못 본 척 냉담하고 기분 나빠하고 깔아뭉개려 하는 일본의 심사는 어제 그제의 일이 아니었다. 그 집요함을
도처에서, 사사건건 우리는 보아왔다.
- “지각 있는 사람은 함부로 그런 말 하지 않았다”는 말을 보자. 자가당착도 이 정도면…… 미안한 얘기지만 그가
팔푼이가 아니라면 그는 우리를 팔푼이로 보았는가. 이보시오, 지각이 있어서 함부로 말을 하지 않았다고요? 함부로 말을 했다면 목이
남아 있었을까? 하기는 우리 민족 전부가 지각이 있었지. 살아남기 위하여. 지금은 총독도 없고 말단 주재소의 순사도 없다. 우리를 겨누는 총칼도 없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입을 다물어야 하는가. 어째서 일본을 성토하면 안 되는가.
- 나는 젊은 사람에게 더러 충고를 한다.
“일본인에게는 예(禮)를 차리지 말라. 아첨하는 약자로 오해받기 쉽고
그러면 밟아버리려 든다. 일본인에게는 곰배상을 차리지 말라. 그들에게는 곰배상이 없고 마음의 여유도 없고 상대의 성의를
받아들이기보다 자신의 힘을 상차림에서 저울질한다.”
-몇 해 전의 일이다. 일본의 어느 잡지사 편집장이 내 집을 찾아온 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을 기억한다.
“일본을 이웃으로 둔 것은 우리 민족의 불운이었다. 일본이 이웃에 폐를 끼치는 한 우리는 민족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피해를 주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민족을 떠나 인간으로서 인류로서 손을 잡을 것이며 민족주의도 필요 없게 된다.”
일빠들에게도 보여주고 싶다. 스크랩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