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 <늑대소년>에 대한 스포도 있습니다
한국 최초의 SF 상업 영화, 그것도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라길래 흥미가 있었지만
티저영상을 보고 대사가 너무 진부해서 기대가 팍 식었어.
그러다가 넷플릭스에 올라와서 봤는데 기대 이상이더라 ㅋㅋ
일단 가장 높게 평가하는 점은 비록 부족하지만 'PC'적인 요소가 많다는 것.
여자 선장, 트렌스젠더 로봇, 단체 수장이 흑인인 점 등
알탕 위주의 한국영화와 달리 사회의 비주류(여성, 흑인, 성소수자)에게 의미있는 역할을 부여했다고 생각해.
두번째로 좋았던 점은 '국뽕'.
다른 톨들이 말해준대로 일본어를 들을 수 없던 영화라서 좋았어.
보통 디스토피아 영화, 드라마에서 대충 망한 도시에 일본어 네온 사인이 걸려있지만, 이 영화에선 전혀 없었고
스윽-지나가는 승리호에 당당히 태극기가 그려진 점도 좋았어. (출생률을 고려했을 때 2092년에 대한민국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현실적인 생각은 접어두고)
이 장면이 사실 감독이 보여주고 싶은 모습이라고 느꼈어. 이것이 K-영화! 하고 외치는 느낌이랄까.
티저 영상에서 가오갤스러움을 팍팍 풍겨서 그 자체에 대해서는 별로 실망이 없었고,
오히려 내가 느꼈던 아쉬운 점은 극본이야.
스토리의 문제도 있지만, 몇몇 장면과 대사는 이전에 보았던 영화를 떠올리게 하더라.
김태리를 제외하고, 주연 3명은 이전의 영화에 대한 기시감을 불러일으켰어.
특히 제일 심했던게 고스톱을 치던 씬이었어. 타짜의 유해진, 극한직업에서 마작하던 진선규.
'업동이'가 여성이 되고 싶다는 설정은 전우치의 유해진이 생각났고.
굳이 이렇게 비슷하게 갔어야 했나? 좋은 배우들인데 이전 작품을 답습하는 느낌을 주는 연출이라 아쉬웠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시도치고는 훌륭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해.
코로나 때문에 극장에서 보지 못한게 정말 아쉽지만, 이토록 많은 언어가 들어간 영화를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을 통해 전세계 사람들에게 소개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도 들고.
사실 마지막으로, 그리고 제일 말하고 싶은건 '순이'라는 존재에 대한 거야.
트위터에선가, '순이'라는 장치가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고 쓴 글을 읽었어.
아역 캐릭터는 꽃님이만으로도 충분한데 굳이 부녀간의 사랑을 두 명이나(강박사, 김태호) 보여줄 필요가 있었을까?
그런데 승리호를 보고, 감독의 전작인 늑대소년을 보고, 다시 승리호를 보니까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
그래서 썰을 좀 풀어봤어 ㅋㅋ (어디까지나 내 생각)
'순이'라는 이름과, '송중기'라는 배우를 두 작품에 연결시켜보면 재미있는 생각을 할 수 있는데,
두 작품 모두에는 공책에 ㄱㄴㄷㄹ를 쓰면서 글자를 배우는 장면이 나와.
두 사람(늑대소년의 철수, 승리호의 순이)은 말을 하지 못하는 공통점이 있는데,
말을 할 수 없는 이들이 글을 배워서 세상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늑대소년의 순이와 승리호의 태호인거지.
늑대소년에서는 '순이'가 철수에게 처음 만나는 세상이었어. 사회화되지 않은 소년이 순이를 통해서 사람들과 처음 교류하기 시작했지.
그런데 승리호에서는 태호가 '순이'를 그렇게 키우잖아. 소리가 들리지 않는 순이가 교류하는 유일한 세계.
만약 늑대소년의 '철수'가 제대로 된 이름을 부여받고 다시 태어나서 승리호의 '태호'가 되고,
다시 운명처럼 순이를 만나서 자신이 순이에게 배운대로 순이에게 아낌없는 애정을 주고 세상을 알려주는 거라면 어떨까?
더 나아가면 순이가 궤도이탈을 하는 장면도 늑대소년과 연관지어서 해석해 볼 수 있어.
늑대소년에서 순이는 철수를 떠나 한 가정을 이루고 살 동안 철수는 홀로 눈 오는 겨울마다 눈사람을 만들면서 순이를 기다렸을거야.
승리호에서도 순이는 태호를 떠났고, 태호는 순이를 찾아 온 우주를 헤매고 다녔지. 그러다가 자신을 받아주는 가족같은 공동체를 만나고, 그제서야 순이를 진심으로 보낼 수 있게 된거지.
두 작품 간에 9년이라는 간극이 있고, 소년미 넘치던 송중기는 이번 작품에서 한 아이의 아버지 역할이 꽤나 어울려서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게 느껴지는데,
늑대소년에서 학대받은 소년이 시간을 뛰어넘어 나에게 애정을 준 존재(순이)를 운명처럼 다시 만나서 받은 사랑을 돌려준다고 생각하니까 눈물이 핑 돌더라구.
굳이 감독이 순이 이야기를 집어넣은 이유는, 태호의 아이 이름을 굳이 '순이'라고 정한 이유는 내가 생각한 의도가 조금은 들어있지 않았을까?
어디까지나 얼기설기 얽힌 추측일 뿐이니 안맞는다고 생각하면 비난은 삼가주길 바라.
+ 방금 넷플릭스로 다시 돌려보고 오는 길인데 이 해석에 무게가 실리는 장면을 발견해서 몇가지 추가할게ㅋㅋ
1. <늑대소년>에서는 순이가 기타를 연주하면서 철수에게 노래를 불러준다. 그 노래는 엔딩 크레딧에 배경음악으로 쓰인다.
<승리호>에서는 태호가 순이에게 실로폰을 연주하면서 노래를 불러준다. 그 노래 운율은 역시 엔딩 크레딧에 배경음악으로 쓰인다.
2. <승리호>에서 태호가 불렀던 노래 가사는 '밥 먹을 때, 신발 신을 때, 빨래 할 때도 생각나.' 이다.
<늑대소년>에서 순이는 철수에게 밥 먹는 법(젓가락 쥐는 법)과 신발끈 묶는 법을 가르쳤다.
<승리호>에서는 빨래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지만, <늑대소년>에서 순이는 빨래를 널다가 철수를 처음 만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