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말하는 '여자가 무섭다'는 여자가 말하는 '남자가 무섭다'랑 다름. 내게 범죄를 저지를 거 같고 목숨의 위협을 받는다 그런 게 아니라 여성이 내게 남자로서 요구하는 그런 사회적인 역할을 내가 해낼 수 없을 거 같아서 무섭다고 하는 그 느낌? 자기 욕망 드러내고 할 말 다 하는 소위 '기 센 여자'를 무서워할 거 같은 느낌? 받음.
남주인 이카리 신지 자체가 내내 좀 무기력하고 우울하고 '하고 싶지 않아' '도망치면 안 돼' 이러는 앤데 진짜 우울하거나 최소 우울해 본 적 있는 사람이 만든 캐 같았음.
나도 예전에 우울증 있을 때 봤던 거라 내용 기억은 잘 안 나는데 갑자기 생각나서 적는 거라 내 기억하고 내용이 틀릴 수 있음.
주인공 입장에서 보면,
주요 여캐인 카츠라기 미사토, 아야나미 레이,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는 다 (엄마인 이카리 유이 제외하고) 어떤 방식으로는 나에게 심리적 압박을 주는 '무서운' 여자들임. 그래서 부담스럽고 도망치고 싶어.
미사토는 하기 싫은데 무섭고 힘들고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는 에바에 타는 일 강요하고 위로랍시고 성적인 일 하려드는 것도 좀 이상하고 무서운 어른 여자의 이미지.
아야나미 레이는 엄마 닮았는데 초반에 내가 에바 안 타면 다치고 불쌍한 얘가 대신 나간대서 어쩔 수 없게 에바 타게하는, 동정심과 죄책감이 드는 연약한 소녀의 이미지.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는 나에게 라이벌 의식 있고 실제로 잘나기도 했는데 사실 내게 열등감도 애정도 있고 여튼 복잡한 감정을 갖고 있고 나를 '바보'라고 부르고 무시하면서 날 압박주는데 또 내가 사실 성적으로 욕망하기도 하는 또래 여자의 이미지.
나랑 같은 성별인 부모인 이카리 겐도는 나에게 남성으로서의 롤모델을 전혀 못해주고 나를 사랑하지도 않는 거 같고 하기 싫은 것만 강요함.
근데 남캐인 나기사 카오루는 '난 널 만나기 위해 태어난 걸지도 몰라' 이런 말 하면서 나한테 무조건적 긍정적 호의 보여주고 나 좋아해주고 나한테 부담도 안 줘서 편함. 사랑을 줘야 마땅한 위치에 있으면서 날 사랑해주지도 않고 남성인 이카리 겐도같은 남성도 아니고 날 압박주는 여성도 아님. 여성들하고 있으면 사회적 남성성을 증명해야만 할 거 같은데 일단 남성인 나기사 카오루랑 있으면 안 그래도 되고 오히려 그쪽에게 내가 비호를 받을 수 있음. 여자에게 빌붙으면 기둥서방같은 놈이라고 욕먹겠지만 남자에게 빌붙으면 적어도 난 기둥서방같은 못난 놈은 아니니까. 그리고 여자들은 남자가 아니니까 남자인 날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할 테지만 얘는 남자니까 좀 더 너른 마음으로 날 받아줄 수 있을 거 같음. 최적의 도피처야. 심지어 작중에서 카오루는 날 위해 희생도 하지.
여캐들(미사토, 레이, 아스카)은 너무나 현실적인 압박감이고 남캐인 카오루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도피처임.
이게 이거 만든 사람의 여자와 남자에 대한 인상 같았음.
실제로 그랬는지 어땠는지는 몰라도 여튼... 그래서 마지막화의 그 다같이 이카리 신지에게 박수쳐주면서 축하해주는 장면도 우울증 환자의 퇴원 축하 같은 느낌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