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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국의 줄기를 잘라낸 그는 장갑을 벗고서, 서너 송이를 맨손으로 쥐고 말없이 재윤에게 내밀었다.
"......여기."
푸른색으로 여물어 있는 꽃잎, 새파란 잎사귀, 쥐고 있는 손. 재윤은 엉겁결에 그 수국을 받아 들었다.
맞닿은 손에서 열기가 잎맥처럼 피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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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깜한 방 안에서는 무엇이든 크게 들렸다. 얇은 이불이 살과 스치는 소리, 옆에 누운 어머니가 잠결에 웅얼거리는 소리,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 창 밖너머 벌레 우는 소리.
옆으로 돌아누웠던 강우가 눈을 한 번 깜박였다.
창문에서 비가 떨어지는 소리. 예보에는 없던 비가 가늘게 한두 줄기 내리고 있었다.
정원에 약쳤는데 비 내리네.
멋없는 생각을 하다 말고 강우가 몸을 뒤척였다. 눈꺼풀을 한 번 닫고 다시 한 번 열 때 마다 정원에서의 목소리가 귓바퀴 위로 살금살금 쌓인다.
......수국만 좀 꺽어가려고.
귓전을 맴도는 목소리. 느리게 깜박이던 눈꺼풀이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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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는게 아니었다. 그러면 안됐다. 더 부드럽게, 더 좋은 말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서강우는 늘 다정에 서툴렀다. 한재윤처럼 웃으면서 얘기하는 것이 어려웠다. 무슨 말을 더하기 전에 모난 말이 튀어나왔다
"......."
그 점이 서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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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철에는 순한 식물들도 질겨지기 마련이었다. 물기를 잔뜩 먹어 살을 불린 식물들은 잘 휘어지지도 않았다. 특히나 수국이 자라는 귀퉁이는 억센 나무와 풀들이 많이 자라 있었다. 빳빳하게 선 정원의 가지들을 헤치다 거기에 팔을 긁힌 것 같다며 재윤이 난감하게 웃었다.
"이러면 좀 멍청해 보이나......."
늘상 보는, 심지어 꽃도 자주 꺾느라 왔다 갔다 하는 정원에서 헤매다 살이나 찢어먹는 게 저도 영 바보 같게 느껴졌는지, 재윤의 콧등이 부끄럼을 타며 빨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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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가 푸른색으로 가득했다.
풀이 흙을 가리지 않도록 남김없이 정리하고, 돌들은 가장자리로 치워 나름 정렬을 해두었다. 정원 입구부터 시작한 작업이 벌써 수국을 심은 장소까지 다다른 것이었다.
강우가 흙투성이인 바지를 털고 일어났다.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면, 풀투성이의 정원에 강우가 흙을 헤집고 발로 밟아 다진 작은 '길'이 생겼다.
"......."
꽃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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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이라도 상관없어요. 그냥, 제가."
제가 그냥 좋아요. 재윤의 뺨이 따듯하게 상기되어있었다.
생각하는 것으로도 이미 벅찬 듯 얼굴 가득 웃음이 드리워졌다.
"그냥, 제가 좋아하고 싶어요."
나무의 그늘처럼, 피부 위로 고요히 내려앉은 듯한 웃음은 제 나이다운 웃음으로 보기 힘들었다.
고작 열일곱인데
서강우와 한재윤은 고작 열일곱인데, 식물같이 사랑을 했다.
아무도 모르게 잎맥을 돋웠다가 햇빛을 받으면 받는 대로 피어나고,
물이 없으면 없는 대로 잎사귀를 접는 멍청하고 지지부진한 사랑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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