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가 밝기 때문에 자칫 ‘오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 했다는 말로 들린다. 그렇다. 따뜻하고, 극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발랄함으로 건조한 황시목과 대치되는 인물이라면, ‘프로페셔널한 부분을 얼마만큼 염두에 둘 것인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원한 따뜻함은 이런 거다. 인정이 넘치고 정서적인 부분과 결부되는 따뜻함이 아닌, 아주 유능하고 유연한 사람의 여유에서 풍기는 따뜻함.
기억을 더듬어보니, 정서적인 면에서의 따뜻함이 강조됐다면 뭔가 전형적인 캐릭터가 나왔을 듯하다. ‘피도 건조할 것 같은 황시목과 달리 인정 많고 발랄하며 따뜻한 여자 형사’ 뭐 이런 것. 시즌 1에서는 의상도 마음대로 입었다. 직업군이나 성별에 따라 ‘형사면 형사답게’, ‘여자면 여자답게’ 식으로 존재하는 기준과 고정관념이 싫다. 나는 셜록 홈즈나 콜롬보 형사처럼 입고 싶다고 의견을 냈다. 트렌치코트나 재킷도 입고, 흔히 ‘강력계’라고 할 때 떠올리지 않는 차림으로 일하기도 하고. 이 여자는 경찰대를 나왔으니 이미 엘리트다. 여고생 같은 단발머리 스타일이든 옷차림이든 조금 괴짜 같은 면이 있어도 똑 부러지고, 잘 뛰어다니고, 범인도 잘 잡는 유능한 형사기 때문에 아무도 왈가왈부하지 못하는 거다.
처음 그 인물을 받아들고 전사 작업을 거칠 때는 어떤 스토리를 상상했나? 애초에는 한여진의 나름 사연 있는 전사가 대본에 주어져 있었다. 그런데 제작진과 여러 논의 끝에 원래 설정된 전사를 없애자고 결론이 났다. 연기하는 내 입장에선 그게 큰 도움이 됐다. 구체적 사연을 지녔다는 설정이 있으면 특정 상황에서 보이는 반응이나 뱉는 말이 사심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는데, 얽매인 전제가 사라지니까 투명한 사람이 됐기 때문이다. 그때부터는 상상의 여지도 생긴다. 이 여자는 어렸을 때 만화나 <셜록 홈즈> 같은 탐정 소설을 보면서 꿈을 키우지 않았을까 싶었다. 개인적인 사정이나 트라우마 때문이 아니라, 정말 순수한 마음에서 사회 정의를 추구하는 인물 말이다.
<비밀의 숲>은 직업에 관한 이야기 같다고도 느꼈다. 그런 느낌을 받은 이유가 바로 당신이 얘기한 부분 때문인 것 같다. 배두나와 조승우 모두 순수한 직업 정신이 밑바탕에 있고, 딴 마음 없이 직진했다. 그래서 일부 시청자가 고대하던 러브 라인 따위도 일어나지 않았고(웃음). 사실 한여진은 아주 부잣집 딸일지도 모르지. 형사 생활을 하느라 바쁘지만 알고 보니 옷은 다 명품이고, 옥탑방에 살아보는 게 로망인 그런 여자(웃음). 이렇게 열려 있는 면 때문에 어떻게 보면 판타지적인 인물이다. ‘이런 사람은 현실에 없을 것 같아, 하지만 있다면 이런 사람 덕분에 세상은 살 만할 거야’ 같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카메라 앞에서는 감정을 크게 드러내려 하지 않지만, 실상은 눈물을 주체하기 힘든 사람인가? 어릴 때부터 눈물이 많았다. 조승우 씨가 나보고 정말 신기 하다고 한 점이 있다. 나는 기분이 안 좋은 연기를 하는 신을 앞두고 있으면, 이미 기분이 안 좋은 상태가 되어 있다. 본능적으로 그렇게 된다. 가끔 ‘왜 이렇게 짜증이 나지?’ 싶을 때 보면 그런 감정이 필요한 신을 앞두고 있을 때다. 나 너무 이상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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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배두나가 연기하는 한여진 진짜 너무 좋다 ㅠㅠ
한여진만 왜 전사가 없나, 캐릭터가 납작한가 하는거 비숲 지적할 때 단골소재로 나오는 얘기였는데 오히려 상의해서 없앤거였다니 신선하다. 사실은 부자집 딸인데 옥탑에서 살아보고 싶었을 수도 있다는 부분도 ㅎㅎ 되게 재밌네
머리도, 옷도 마음대로에 괴짜같은 면이 있지만 이미 경대나온 엘리트고 실력이 있으니 아무도 함부로 못한다는 부분도... 직업적 유능함을 베이스로 연기하니까... 하 ㅠㅠ (시목이랑 파트너로 함께하기 시작한 부분도 애초에 여기에서 기인하는거고)
확실히 여진이가 기존의 정의감만 넘치는 따뜻한 여캐들이랑 달랐던 이유가 있는거 같아.
사랑해요 한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