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준 : 아버지 이석찬은 사출업을 했는데, 경기가 좋았다. 이대로 몇 년 만 더 고생하면, 큰 부자는 아니더라도 작은 부자는 될 수 있을 거 같았다.
돌 전에 엄마가 사망했던 것을 제외하면, 유년기의 이혜준은 유복하고 여유로웠다. 이석찬은 어린 딸이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재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엄마의 빈자리는 고모 이만옥이 채워 주었다.(생략) 몇 번 재기를 시도했지만 번번이 무너졌고, 그럴 때마다 이석찬의 마음에는 울화가 쌓여갔다. 결국 이혜준이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 스스로 세상을 등지고 만다. (생략) 아버지의 장례를 마친 초등학교 3학년의 이혜준은, 가끔씩 위로를 받던 피아노를 팔고 고모네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더 이상 피아노를 칠 수 없다는 것. 고모 부부가 아무리 위해준다고 해도, 동갑인 사촌 마리와 같을 수 없다는 것. 결국 고모네 집에서 군식구라는 것. 이혜준은 너무 일찍 눈치 보는 법을 배웠고, 너무 일찍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법을 배웠다. 이혜준에게 꿈이 있다면 독립이었다. 고모네 집에서, 스스로 경제력을 갖고 나오는 것이었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또 한 번 경제가 휘청했던 2008년. 이혜준은 특성화고 1학년이었다. 특성화고에서 받은 장학금이 아니었다면 글로벌금융위기의 어려움 속에서 학업을 지속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혜준은 자신의 선택이 다행스러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한다는 것은, 이혜준에게는 경제적 독립을 의미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막상 경험해본 세상은 혹독했다. 세무사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4년 동안 월급은 거의 제자리였고, 커피 심부름, 청소, 기타 등등의 모든 잡일이 고졸 사원 이혜준에게 떨어진 업무였다. 좀 더 나은 조건을 찾아 직장을 옮겨도 보았다.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처음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불평등과 차별에 대해서 절감했다.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세상에 자신을 맞추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대학에 진학했다. 행정학을 선택했던 것은, 행정을 통해서, 조금이라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소박하고 단순한 믿음에서였다.
학자금 대출을 받아가며, 말 그대로 대학 4년을 버텼다.
대학 4년 내내 하루 4시간 이상은 자지 않고 도서관 귀신이 되었다. 더 이상은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만큼 열심히 공부했다. 이유는 단 하나. 안정되게, 잘 살아야 한다는 염원 때문이었다. <국가공무원 5급 공개경쟁채용시험>에 당당히 합격하고, 기재부 국제금융국 사무관이 되었을 때, 이혜준은 피아노 학원에 등록했다. 이석찬의 몰락과 함께 중단했던 꿈이었다. 고모네 집에서 나와 마침내 독립을 이루었을 때, 침대를 포함한 모든 가구, 가전제품은 중고 사이트를 뒤져서 저렴하게 구입했다. 단 하나 300만원 육박하는 피아노만 빼고.
고모는 미쳤다고 혀를 찼지만, 이혜준은 행복했다.
기재부 생활은, 예상은 했지만 녹록치는 않았다. 대다수의 신임 사무관들은 집안이 좋았다. 집안의 든든한 지원을 받으며, 좋은 대학을 나와 고시를 준비하는, 일종의 엘리트 코스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학벌에 대한 차별, 성별에 따른 차별도 은밀하게 엄존했다.
그러나 주어진 것들에 지고 싶지 않았다. 국제금융에 대한 자신의 감각을 어필하기 위해 최선을 다 했고, 소신 있는 관료가 되기 위해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눈치를 보지 않았다.
노골적으로 자신을 무시하는 나국장 앞에서도 씩씩함을 잃지 않았다. 억울함, 부딪힘도 있었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혜준이 진짜 이렇게 보니까 너무 짠하고 대견하고 ㅠㅠ 마지막회에 허부총리랑 독대씬에서 울던 장면이 더 와닿아 ㅠㅠ
돌 전에 엄마가 사망했던 것을 제외하면, 유년기의 이혜준은 유복하고 여유로웠다. 이석찬은 어린 딸이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재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엄마의 빈자리는 고모 이만옥이 채워 주었다.(생략) 몇 번 재기를 시도했지만 번번이 무너졌고, 그럴 때마다 이석찬의 마음에는 울화가 쌓여갔다. 결국 이혜준이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 스스로 세상을 등지고 만다. (생략) 아버지의 장례를 마친 초등학교 3학년의 이혜준은, 가끔씩 위로를 받던 피아노를 팔고 고모네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더 이상 피아노를 칠 수 없다는 것. 고모 부부가 아무리 위해준다고 해도, 동갑인 사촌 마리와 같을 수 없다는 것. 결국 고모네 집에서 군식구라는 것. 이혜준은 너무 일찍 눈치 보는 법을 배웠고, 너무 일찍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법을 배웠다. 이혜준에게 꿈이 있다면 독립이었다. 고모네 집에서, 스스로 경제력을 갖고 나오는 것이었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또 한 번 경제가 휘청했던 2008년. 이혜준은 특성화고 1학년이었다. 특성화고에서 받은 장학금이 아니었다면 글로벌금융위기의 어려움 속에서 학업을 지속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혜준은 자신의 선택이 다행스러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한다는 것은, 이혜준에게는 경제적 독립을 의미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막상 경험해본 세상은 혹독했다. 세무사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4년 동안 월급은 거의 제자리였고, 커피 심부름, 청소, 기타 등등의 모든 잡일이 고졸 사원 이혜준에게 떨어진 업무였다. 좀 더 나은 조건을 찾아 직장을 옮겨도 보았다.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처음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불평등과 차별에 대해서 절감했다.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세상에 자신을 맞추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대학에 진학했다. 행정학을 선택했던 것은, 행정을 통해서, 조금이라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소박하고 단순한 믿음에서였다.
학자금 대출을 받아가며, 말 그대로 대학 4년을 버텼다.
대학 4년 내내 하루 4시간 이상은 자지 않고 도서관 귀신이 되었다. 더 이상은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만큼 열심히 공부했다. 이유는 단 하나. 안정되게, 잘 살아야 한다는 염원 때문이었다. <국가공무원 5급 공개경쟁채용시험>에 당당히 합격하고, 기재부 국제금융국 사무관이 되었을 때, 이혜준은 피아노 학원에 등록했다. 이석찬의 몰락과 함께 중단했던 꿈이었다. 고모네 집에서 나와 마침내 독립을 이루었을 때, 침대를 포함한 모든 가구, 가전제품은 중고 사이트를 뒤져서 저렴하게 구입했다. 단 하나 300만원 육박하는 피아노만 빼고.
고모는 미쳤다고 혀를 찼지만, 이혜준은 행복했다.
기재부 생활은, 예상은 했지만 녹록치는 않았다. 대다수의 신임 사무관들은 집안이 좋았다. 집안의 든든한 지원을 받으며, 좋은 대학을 나와 고시를 준비하는, 일종의 엘리트 코스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학벌에 대한 차별, 성별에 따른 차별도 은밀하게 엄존했다.
그러나 주어진 것들에 지고 싶지 않았다. 국제금융에 대한 자신의 감각을 어필하기 위해 최선을 다 했고, 소신 있는 관료가 되기 위해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눈치를 보지 않았다.
노골적으로 자신을 무시하는 나국장 앞에서도 씩씩함을 잃지 않았다. 억울함, 부딪힘도 있었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혜준이 진짜 이렇게 보니까 너무 짠하고 대견하고 ㅠㅠ 마지막회에 허부총리랑 독대씬에서 울던 장면이 더 와닿아 ㅠㅠ
나도 지금 가슴 먹먹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