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어디서도 말하지 않은 내 숨겨진 데뷔작이 떠오른다
내 첫번째 작품으로 얘기해온 단편 <백색인>이전에 <룩킹 포 파라다이스>라는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든 적 있다
노란문(연세대 영화동아리) 크리스마스 파티 때 이십명 가량의 관객을 앉혀놓고 얼굴이 시뻘개져서는 생애 첫 시사회를 열었었다
고릴라가 주인공인 20분짜리 인형 애니메이션으로 당시 아르바이트해서 샀던 히타치 캠코더를 이용해
고릴라를 일일이 움직여가면서 '콤마촬영'을 했다
<월레스와 그로밋>(1992) 같은 클레이 애니메이션을 떠올리면 된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때까지도 나는 '어떤 감독이 될까' 진지하게 고민했던 것 같다
촬영에도 관심이 많아서 '촬영을 할까, 연출을 할까' 고민했었고
연출을 한다면 '실사를 할까, 애니메이션을 할까' 하는 것이 당시 나의 유일한 딜레마였다
그런데 <룩킹 포 파라다이스>를 만들면서 애니메이션을 했다가는 성격 버리겠다는 생각에 애니메이션의 꿈을 포기했다
힘들게 사흘동안 촬영했는데 돌리면 10초 밖에 안나오니까(웃음) 정말 허무하고 고통스러웠다
물론 나중에 알고보니 감독 혼자서 다 하는 게 아니더라
촬영을 종료하던 날, 고릴라를 내던지면서 "야, 한 번이라도 네가 좀 알아서 움직여봐!" 하고 소리쳤다
그러니 나중에 실사 촬영할 때 얼마나 편했겠나
배우들이 알아서 다 말하고 움직이니까
아무튼 지구상에서 그 작품을 본 사람은 바로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뿐이다
언젠가 나의 유작 영화 DVD에 이스터 에그로 넣을 생각이다(웃음)
<데뷔의 순간>이라는 책에서 재밌게 읽은 기억이 있어서 일부분 가져와 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