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보고 싶은 결혼 예능을 계속 생각해본다. 아마도 결혼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전제로 한 여성 예능인 것 같다. 제목은 <결혼 안하는 여자>. 저출생과 인구감소에 대한 우려만 있고 낙태가 불법인 것 말고는 딱히 방도가 없는 사회에서 도저히 만들어질 것 같지 않은 쇼.
나는 젊은 세대의 페미니즘 열기가 남성 중심 시사 예능의 종말을 불러올 줄 알았다. 순진한 생각이었다. 악재를 기회로 만드는 것이 직업인 사람들답게 이 상황을 ‘핍박받는 아저씨(꼰대)를 선해하는’ 흐름으로 자연스럽게 전환해버렸다(<더 꼰대 라이브>, tvN).
나는 미디어 속 여성 화자들이 너무 부드럽고, 너무 설득적이고, 너무 방어적이라는 의견에 동의한다. 그래서 볼륨이 크고 화법이 거친 여성들이 좋았다. 하지만 요즘엔 말의 세기 못지않게 조금 덜 거칠어도 방향을 잃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지구력도 중요한 것 같다. <방구석 1열>의 변영주, <대화의 희열> 게스트였던 이수정 교수, <거리의 만찬>의 박미선, <알쓸신잡>의 김진애 박사처럼 기존 판에서 오랜 시간 자기만의 조용한 투쟁으로 커리어를 일군 여성 멘토들의 말에 마음이 움직이는 이유다.
매일 자신을 어떻게 가꾸는지가 주요 쟁점이었던 미디어 속 여성 멘토-멘티 관계에서 벗어나 오랜 시간 자신의 언어를 훈련해온 멋진 멘토와 함께 공적 자리에서 자신의 자아를 키우는 방법을 질문하고 답변하는 걸 보는 것은 나에게는 또 다른 활력과 자극이 된다.
‘<무한도전>’은 남성 예능이 아니라, 그냥 재미있는 예능이다.’ 이 문장은 주어만 바꿔서 대부분의 한국 남성 예능 프로그램들이 눈 가리고 아웅하는데 사용하는 변명이다. 남성 중심 사회의 고리타분한 책임 회피 방식이기도 하다.
나의 이유는 이렇다. 한국어가 서툰 러시아 며느리가 등장하거나 성인 남성을 결혼시키려고 미모의 여성과 돌아가며 선을 잡는 것이 더이상 재미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 쇼는 끝나야만 했다. ‘국민 예능’ 역할의 일환으로 시의적인 주제를 고정 패널들끼리 토론하는 것도, 여성은 이영애와 김연아처럼 신성시되는 자리에서만 볼 수 있거나 남성출연자들의 들러리로 출연해 이유없이 인신공격을 당하는 역할로 제한되어 있는 것도 더는 흥미롭지 않았다. 역사를 말하고, 소외된 것을 듣고, 불의에 참지 않으며, 육체의 한계에 도전하는 모든 기회가 오로지 남성에게만 주어진 방송을 보면서 공감하고, 감동하고, 응원하는 일도 앞으로는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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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시리즈 중 하나인 복길 작가님의 <아무튼, 예능> 이라는 책에서 발췌해 놓은 문장들이야.
전자책으로 봐서 페이지 수가 정확하지 않아서 따로 기입하지는 않았는데 문제가 된다면 말해줘, 전자책 페이지 수라도 적을게.
이번 주에 논란 되었던 거리의만찬 시즌2 진행자 교체 건을 보면서 평소에 하고 있었던 생각들, 또 공감해가며 읽었던 이 책의 구절들이 생각나서 가지고 와 봤어.
추천 스크랩했어.. 내가 요즘들어 많이 하는 생각이기도 해서 공감하며 읽었어 ㅠ 좋은 글 고마워 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