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img.dmitory.com/img/202001/FT5/fY1/FT5fY1hVwic260QyUWMmE.jpg
이를 보고 아연실색하던 조선 통신사의 기록도 남아 있음.
조선 후기의 문장가이자 1719년(숙종 45년) 조선통신사의 제술관(製述官·시문과 학문 토론을 담당하던 관리)으로 일본을 다녀온 신유한은 일본에서의 경험을 정리한 '해유록(海遊錄)'에서 "일본인이 싸움에서 무모하게 덤벼드는 것은 자기 몸 하나 편안해지기 위해서일 뿐"이라고 기술했다.
(중략) 조선통신사에게는 글이나 그림 청탁이 쇄도했다. 신유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책에서 "날마다 시를 써달라고 조르는 일본인들에게 시달려 우울하고 답답한 심정을 견딜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요청은 심지어 새벽까지 계속됐다. 그는 답답한 심정을 달래기 위해 일본인 통역관과 호위병을 대동하고 밖을 거닐었다.
저자에게 일본의 음란한 풍속은 충격적이었다. 신유한은 "사창가의 창녀들이 화장해서 용모를 예쁘게 꾸미고 외설스럽게 구는 형태를 알게 되었는데 너무 저질스러워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었다"고 개탄했다.
남창(男娼) 풍조에 대해선 아연실색한다. "열서너 살에서 스물여덟 살까지의 미남자들이 향기로운 기름을 머리에 바르고 눈썹을 그리고 분을 바르고 알록달록 무늬를 수놓은 옷을 입고 있으면 아름다운 꽃 한 송이 같았다. 왕족과 귀족은 물론 부유한 상인에 이르기까지 이런 남창에게 재물을 쏟아붓지 않는 자가 없어 밤낮으로 반드시 함께하며 남창의 애인을 질투하여 죽이기까지 했다." 신유한은 일본 유곽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지만 외국 풍속을 살펴 취할 것은 취하고 경계할 것은 경계해야 한다며 이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여러 편의 시를 지어 함께 실었다. 그중 한 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어쩌면 이리도 적나라할까. 낭군이 품고 온 그림 펼치니, 부끄럼 모르는 낭군에게 감동해 그림과 비교하며 즐긴답니다."
ㅊㅊ https://m.mk.co.kr/news/culture/view/2016/09/686716/
이를 보고 아연실색하던 조선 통신사의 기록도 남아 있음.
조선 후기의 문장가이자 1719년(숙종 45년) 조선통신사의 제술관(製述官·시문과 학문 토론을 담당하던 관리)으로 일본을 다녀온 신유한은 일본에서의 경험을 정리한 '해유록(海遊錄)'에서 "일본인이 싸움에서 무모하게 덤벼드는 것은 자기 몸 하나 편안해지기 위해서일 뿐"이라고 기술했다.
(중략) 조선통신사에게는 글이나 그림 청탁이 쇄도했다. 신유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책에서 "날마다 시를 써달라고 조르는 일본인들에게 시달려 우울하고 답답한 심정을 견딜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요청은 심지어 새벽까지 계속됐다. 그는 답답한 심정을 달래기 위해 일본인 통역관과 호위병을 대동하고 밖을 거닐었다.
저자에게 일본의 음란한 풍속은 충격적이었다. 신유한은 "사창가의 창녀들이 화장해서 용모를 예쁘게 꾸미고 외설스럽게 구는 형태를 알게 되었는데 너무 저질스러워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었다"고 개탄했다.
남창(男娼) 풍조에 대해선 아연실색한다. "열서너 살에서 스물여덟 살까지의 미남자들이 향기로운 기름을 머리에 바르고 눈썹을 그리고 분을 바르고 알록달록 무늬를 수놓은 옷을 입고 있으면 아름다운 꽃 한 송이 같았다. 왕족과 귀족은 물론 부유한 상인에 이르기까지 이런 남창에게 재물을 쏟아붓지 않는 자가 없어 밤낮으로 반드시 함께하며 남창의 애인을 질투하여 죽이기까지 했다." 신유한은 일본 유곽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지만 외국 풍속을 살펴 취할 것은 취하고 경계할 것은 경계해야 한다며 이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여러 편의 시를 지어 함께 실었다. 그중 한 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어쩌면 이리도 적나라할까. 낭군이 품고 온 그림 펼치니, 부끄럼 모르는 낭군에게 감동해 그림과 비교하며 즐긴답니다."
ㅊㅊ https://m.mk.co.kr/news/culture/view/2016/09/686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