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윤희에게>의 출발점을 짚고 넘어갔으면 한다. 일본 오타루 여행에서 중요한 인상을 얻었고, 부산국제영화제 인터뷰 당시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2017)에서 여성 인물을 더 집중적으로 다루지 못한 것에 대해 감독으로서의 아쉬움을 토로한 적 있다. 또 매년 퀴어 퍼레이드에 참가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오타루 여행 중에 만난 동네 할머니 한분이 “눈이 언제 그칠까요?”라고 말하는 모습이 그 공간에 대한 인상으로 남았다. 매년 눈이 아주 많이 오는 동네에서 그 말을 하는 것이 새롭게 들렸다. 정서적인 측면에서 내가 당시에 갖고 있던 그런 막막한 감정들을 <윤희에게>에 담으려고 했다. LGBTQ에 대한 관심은 이 영화가 세상에 꼭 나와야 하는 이유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많이 하면서 확신으로 이어졌다. 한국 중년 여성의 퀴어 서사는 아직 아무도 하지 않은 이야기다. 왜냐하면 여러모로 너무 어려우니까. 누가 등 떠민 것도 아닌데 2019년을 살아가는 창작자로서 스스로 부여한 책임감과 부담감이 있었다.



-그 어려운 이유 중에는 창작자가 스스로 당사자성의 여부를 두고 검열하게 되는 지점도 있었을 것 같다.

=‘이게 내가 해도 되는 이야기인가?’라는 생각은 모든 감독들이 갖고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하지만 내가 어디 멀리 있는 외계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내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건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야만 할까 싶기도 했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선 얼마간 이중적인 태도가 필요했다. 내 한계점을 명확히 인지하려고도 했다. 기꺼이 오해받고 의심받고, 또 스스로도 그렇게 살피면서 한땀 한땀 만들고 싶었다. 영화가 감독 개인의 문학작품이 아니라는 마음도 중요했는데, 많은 스탭들의 아이디어를 반영했다. 이번 인터뷰에선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부터 함께했던 하지혜 스크립터를 언급하고 싶다. 그녀에게 정말 많은 것을 물었고 의지했다. 나는 많은 이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책임지는 사람이었다. <윤희에게>는 그래서 가능했던 영화다.



-성적 지향을 이유로 정신병원에 다녀야만 했던 윤희, 엄마가 한국인이라는 존재를 숨기고 살았던 준 등 억압되어 있던 인물들이 부지불식간에 삶의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가는 순간들이 영화에 담겨 있다. 준에겐 아버지의 장례식이 그 시발점이 되는데, 윤희에겐 어떤 영화적 장치를 부여했나.

=윤희가 공장에서 나와 철로를 걸을 때 그녀 옆으로 바짝 붙어서 지나가는 기차 신이 그렇다. 그때 돌아보는 윤희의 표정이, 나는 누구이고 지금 어디에 있는가 싶은 황망한 얼굴이다. 윤희란 사람은 10대 시절에 준을 떠나보내고 가족으로부터 크게 상처받은 이후 쭉 잘못된 단추를 끼우며 살아온 사람이다. 오타루로 가는 윤희의 여행은 그 단추를 다시 끼우려고 과거로 가려는 결심이 아닐까. 상처를 제대로 마주한 뒤 첫 단추를 아귀가 맞게 다시 채우고 돌아오는 거지.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 딸과 함께.



-윤희와 준을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존재와 연대가 빛나는 영화다. 서로를 아끼는 사람들끼리 염려하고 배려하며 살아가고 풍경이 비춰진다. 적당히 느슨하고 자유롭게, 겉으로 보기엔 다소 무심하게 굴기도 한다.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서로를 배려하면 좋을지 그 방법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중요한 건 각자 자기만의 방식이 있다는 거다. 특히 가족의 경우에만 가능한 유대가 있다. 이를테면 마사코 고모는 준을 너무 사랑해서 사실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파악하고 있다. 다만 내색하고 표현하지 않을 뿐이다. 좋은 관계를 위해 한뼘의 간격을 유지하는 미덕, 일종의 인내심이다.

-준을 몰래 지켜보다가 택시 안에서 눈물 흘리는 윤희, 오타루의 바에 앉아서 한국말로 소망을 이야기하는 윤희는 김희애 배우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연기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김희애가 해석한 윤희의 어떤 점에 흡족했나.

=배우가 집중했을 때에만 나오는 미묘한 얼굴의 변화 같은 것. 김희애 배우는 아주 많은 표정을 갖고 있어 표정만으로 전달되는 것들이 많았다. 또 김희애 배우가 출근하러 버스 정류장에 서 있을 때, 공장에서 일할 때 어딘가 이질적인 감이 있는데 그게 좋았다. 윤희는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을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어야 했다. 어쩌면 그녀는 그곳을 한참 전에 벗어나, 준이 있는 곳에서 살았어야 하는 인물이다. 그걸 느낌만으로 보여주고 싶었는데 김희애의 존재감이 해낸 것이다. 이런 뉘앙스가 없었다면 윤희 캐릭터가 제대로 설명되지 못했을 것 같다. 오타루 현지에서는 관광객과 현지인을 패딩 착용의 유무로 구분한다고 하는데(웃음), 윤희에게 멋진 코트를 입힌 것도 그 때문이다.



-윤희와 준의 편지는 어떻게 구상했나. 두 사람의 성격과 라이프스타일이 확연히 구분된다.

=다듬어가는 과정에서 캐릭터성이 더해졌다. 준은 일본에서 대학도 다녔고, 현재 동물병원 수의사에, 집 안 곳곳에 책이 많다. 반면 윤희는 고등학고 졸업 직후 결혼해서 새봄을 낳고 지금은 공장에서 조리사로 일한다. 그 둘의 편지는 무척 다를 거라고 생각해서 일부러 차이를 노골적으로 두었다. 사실 처음에는 준의 편지를 한국어로 읽을 계획이었다. 나카무라 유코 배우가 한국어를 열심히 연습하기도 했다. 그런데 편지가 자기 속마음을 전하는 매개체라는 점에서 극중 인물과 배우가 가장 편한 언어로 읽도록 수정했다. 평소에도 서간체만의 감정을 좋아하는데, 말의 방향성이 모든 대상에게 다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한 사람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한 것 같다.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 <애도 일기> 같은 내밀한 에세이들을 좋아하고 <윤희에게>를 쓰기 전엔 슈테판 츠바이크의 <낯선 여인의 편지>를 읽었다.



-준의 편지를 받고, 이어서 자신의 답장을 쓴 뒤에야 영화 마지막에 윤희가 이력서를 쓴다. 인생의 다음장으로 나아가게 되는 순간이 편지에서 이력서라는 쓰기의 활동으로 연결되어 흥미로웠다.

=윤희가 자기 손으로 당당하게 고졸이라고 적는 클로즈업 숏이 첫 시나리오부터 묘사되어 있었다. 뭐랄까, 특별한 경력이 없지만 자기 손으로 그걸 직접 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오빠가 구해준 일을 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일을 찾으려는 노력이고, 무엇보다 그런 모습을 딸에게 보여주는 게 윤희에겐 큰 의미일 것이다. 단지 스스로 용기를 내는 것 이상으로 그 용기를 딸한테 물려주고 싶은 마음. 이력서 장면은 그래서 중요했다. 과거에 어머니가 이력서 쓰는 걸 도와준 적이 있었는데, 어머니가 너무 잘 썼다며 자기가 특별해 보인다고 무척 좋아하시던 게 잊히질 않는다. 그때 느꼈던 감정들도 반영돼 있다.



-오타루 여행을 기점으로 전반과 후반에서 인물들의 행동과 장면 배치가 대구를 이룬다. 영화 초반에 새봄이 삼촌의 사진관에서 증명사진을 찍고 이후 아빠 인호를 만나는 과정이 후반부에선 윤희가 증명사진을 찍고 남편을 만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든지, 초반부에 준이 아버지의 죽음 이후 가부장제로부터 비로소 벗어나는 듯한 의미가 후반부에 윤희가 오빠에게 작별을 고하면서 완성되기도 한다. 마치 서로에게 응답하는 모양새다.

=어떤 관객이 데칼코마니 같다고 표현했던 기억이 난다. 신의 배치나 컷의 순서를 짤 때 나름대로 상당한 논리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나는 어쩐지 무한정 열려 있는 메타포가 불안하다. 비교적 정확하고 닫혀 있는 메타포를 좋아한다. (웃음) 수학적으로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플롯을 볼 때 안도감을 느끼기도 한다. 서사적으로는 윤희와 준, 윤희와 새봄이 다르지만 비슷하고, 한국과 일본 또한 다르지만 비슷하다는 느낌이 이런 형식과 잘 맞겠다고 판단했다. 사회적으로 차별과 혐오가 만연한 분위기에서 결국은 모두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어떤 반복 속에서 계속해서 서로의 기억이 상기되는 감각을 나타내고 싶었다.

​-<겨울왕국2> 개봉 주에도 평일 좌석 판매율 1위, 주말 좌석 판매율도 3위를 지키면서 작품의 힘을 증명했다. 동시에 상영관 부족에 대한 원성도 있었다. 순제작비 10억원으로 전작에 비해 큰 제작 및 배급 시스템을 겪으면서 고충도 많았겠다.

=여느 감독들처럼 적어도 남한테 손해를 끼치진 말아야 한다는 부담감을 떨치기 어렵다. 그래서 사실 마음이 아프다. 손익을 넘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윤희에게>와 비슷한 영화들이 선례를 남겨야만 다음 창작자들이 수월하게 도전할 수 있기에 그런 아쉬움도 크다.



-새 작품은 어떤 이야기를 구상 중인가.

=요즘 우울하고 시니컬한 상태인데 휴식을 취하려고 한다. 내 상태가 이렇다고 작품 속 인물을 비정하게 다뤄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있고, 끝까지 사려 깊은 태도를 취하려 노력하고 싶다. 정체성의 문제에 대해서는 늘 관심이 많고, 장르물도 정말 좋아한다. 잠시 동면기를 가지면서 많이 읽고 보려고 한다. 그럼 곧 새로운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을까.

인터뷰 전문은 링크 (시간나면 꼭 읽어봐)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ine_play&logNo=221728895491&proxyReferer=https%3A%2F%2Fm.blog.naver.com%2Flsh1137%2F221729462163
  • tory_1 2019.12.08 23:13
    어제 읽었는데 인터뷰 참 좋더라. 감독님 인터뷰 다 좋아 가치관도 참 바른 분 같고... 따뜻한 사람같아 그래서 영화도 따뜻한가봐
  • tory_2 2019.12.08 23:22
    덕분에 좋은 인터뷰 잘 읽었어! 내가 생각했던 지점, 그러하지 못했던 지점들이 차곡차곡 담겨있네~
  • tory_3 2019.12.09 00:40
    코트는 별 생각 없었는데 나름 의미 담았다고 한거 보고 계속 유심히 보니까 더 보이는게 있더라. 여러번 봐도봐도 좋은 영화야.
  • tory_4 2019.12.09 00:53
    삭제된 댓글입니다. (삭제일시: 2022/03/10 22:12:46)
  • tory_5 2019.12.09 10:22

    인터뷰 너무 좋다 정말 하나하나 다 의미가 있어서 볼 때마다 놀라워 ㅠㅠ 제발 윤희에게 더더 봐주라..

  • tory_6 2019.12.09 10:52
    삭제된 댓글입니다. (삭제일시: 2020/03/15 11:38:57)
  • tory_7 2019.12.10 12:23

    인터뷰 좋다 톨아 올려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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