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음의 정원을 열심히 가꿔주는 듯한 관리인-애인, 친구 심지어 가족까지-들은 '공짜'로 부릴 수 없다. 그들이 나에게 정서적 지지를 보내고 조언하며 정보를 공유해주는 것은 기분과 정서에 따라 언제든지 들쭉날쭉 할 수 있는 가변적인 것이다. 대게 그런 호의는 쌍방의 '관계 맺음'이라는 심리적 에너지 거래의 부산물인 경우가 많다. 그러니, 남에게 대가 없는 구원을 기대하지 마시라. 김밥천국 정수기에 붙어 있는 문구처럼 인생의 구원도 '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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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녀와 야수, 노트르담 드 파리 속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의 아름다운 자태만으로 호감을 느끼게 된다. 반면 여자 주인공의 경우, 남자의 겉모습 뒤에 감춰져 있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현명하게 파악해야 하는 두 번째 미션이 추가 된다. 그의 진짜 모습과 사랑에 빠져야 하는 이중 시험을 통과해야 진정한 히로인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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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는 여성들이 가족, 친구, 이웃 등 친밀성을 전제로 한 소규모 사회적 관계 속에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발달시키는 이유를 '공적 영역에서 배제된' 특수한 환경 때문이라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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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목매고 있는 행복의 이미지를 만들어낸 놈들은 대체 누구지?" 대중문화와 미디어가 찍어낸 행복과 불행, 사랑과 불모의 이분법적인 대립구도와 연출들은 얼마나 극단적이었는지. 다른 사람의 존재 그늘 없이는 결코 달성할 수 없도록 꾸며놓은 행복의 이미지는 얼마나 교묘하게 장치되어 있었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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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경험이 없다는 것은, 수중에 좋은 자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써먹을 줄 모르는 얼치기와 동급 취급을 받는 것이리라. 하지만 여성의 경우, 남성 편력이 없다는 것은 곧 그녀의 정숙함을 입증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된다. 같은 육신이어도 생물학적 성별에 따라 상이한 계산법을 적용받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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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보편적 요소로 생각했던 성, 사랑, 결혼이란 개념은 사회의 변화에 따라 그 특성과 관계가 변해왔다. 즉 개인적 감정뿐만이 아니라 시대적 상황에 따라 수시로 특징과 정의를 달리하는 '사회, 문화적 산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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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임을 씌우는 것은 권력이다.
네이밍을 하고 딱지를 붙이는 것은 지배자의 위치에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다. 똑똑하지 않은가? 이미 오랜 기간동안 보이고, 판단되고 점수 매겨지는 '피동적' 입장에 놓여있던 여성들이 자연스럽게 분할 통치 기준을 내재화하고 있다는 점을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 여자보다 내가 이뻐, 쟤보다 네가 말랐어, 네 친구보다 네가 더 어려보여' 여자의 눈으로 다른 여자를 심사하고 품평하는 구도를 완성시켜놓고 나면, 이제 남성들은 두 손 놓고 편안히 앉아서도 상향평준화된 외모와 몸매의 여성을 길거리에서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개념녀'라는 여성의 기대 역활 프레임을 하나 더 던져 준다면?
<8>
여자친구들이 '남성들이 인정해주는 자신의 모습'이 동성 친구들의 평가보다 무게 있고 가치 있는 것으로 느낄 때, 남자친구들은 '같은 동성 친구들 사이에서 능력 있다고 인정받는 자신의 모습'에서 진정한 가치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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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은 '좋은 남자'에 대한 여성들의 기대치가 >상향평준화되는 것이 전혀 달갑지 않은 것이다. 괜찮은 남자라는 타이틀을 차지하기 위한 조건이 늘어나게 되면 그에 상응하는 부가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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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수술 후 회복하는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고통스러운 시간들은 그녀에게 '도대체 무엇을 위해 내가 이런 생살을 찢는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했다. 누군가의 여자친구, 아내로서 사랑받는 삶을 쟁취하기 위해서? 타인의 존재에 의탁해야만 얻을 수 있는 안정감과 시혜적 관심이 정말 이 모든 아픔과 슬픔을 감내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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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남성)에 의해 기준이 세워졌기에 절대 완벽하게 충족될 수 없을 '예쁜' 얼굴, 기형적인 조건으로 구성되어 있는 '육감적인' 몸매.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커리어 우먼이 되어야 하면서 동시에 '아내'이자 '엄마'로서 사적 영역의 테스크도 전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워킹맘의 하중, 자신의 의겸을 거침없이 전개시킬 수 있을 정도의 머리를 가져서 남성들의 꽃밭 테스트는 너끈히 통화할 수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할 가부장제 부역자 마인드를 탑재야 하는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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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여성들이 오랜 세월 '좋은 남성과 연결'되고자 하는 고질적인 강박에 기달려야 했던 이유는 자주권, 주체성의 상실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좋은 남성이란 여성이 사회 속에서 겪어야 하는 경제적, 신체적 위협들로부터 버팀목이 되어줄 가장의 조건을 갖춘 이'를 지칭한다. 때문에 좋은 남성과 연결되는 데 고배를 마셨던 여성들은 단순한 감정적 상처가 아니라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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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열외'라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감정에 선조들이 붙였던 이름은 외로움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심리적 공허, 감정적 허기라고 부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자아실현, 자신의 손으로는 쌓을 수 없는 탑, 완성할 수 없는 그림...그것은 외로움이 아니라 박탈감, 좌절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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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몸은 성인인데 피부와 말투는 4~5살짜리 여자아이를 이상적인 연애 상대로 원하는 남성들의 뒤틀린 모순적 요구 사항은 형태만 아주 교묘하게 바꾸어 일터에서도 그대로 답습되고 있었다. '진정한 커리어 우먼이라면, 이상적인 여성성을 유지하면서 업무적인 성과도 동시에 내야 하는 법'이라며 현대 여성들을 이중, 삼중의 지독한 딜레마에 휩싸이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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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성 인권에 관한 이야기를 대화 주제로 올릴 때면 남자친구의 말과 태도에서는 커다란 낙차가 발생하곤 했다.입으로는 '네 말이 맞아, 그래, 그런 점에선 두려움을 부당함을 충분히 느끼고도 남지. 아마 내가 같은 여자였어도 그랬을 거야'라고 하면서도.정작 그의 태도는 이런 식이었기 때문이다. '네 입장에 공감해 줄 수 있도록 어디 한번 나를 잘 납득시켜봐'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주억거리던 그의 태도는 마치 배심원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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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감정적인 지지를 보내는 것은 관계를 유지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쥐어짜내야 하는 시혜적 차원의 도구가 아니다. 나는 왜 그에게 '설명 노동'을 빚지게 된 것일까? 나는 그저 심리적으로 가장 가깝다고 생각되는 상대에게 내 감정과 생각에 대한 동의를 얻고 싶었던 것뿐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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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바운더리 안에서 내가 아무리 '특별하다'고 칭해지더라도, '정신 나간 페미니스트들'이나 나나 가부장제 아래에선 똑같이 2등 시민일 뿐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을 테니까. 2등 시민들 사이에서 아무리 촘촘하게 위계 서열을 나누어봤자 우리는 '누가 더 가부장의 시혜를, 특혜를 많이 받고 있나'를 겨루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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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들이 진정으로 여성을 사랑했다면, 어째서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에게 쏟아지는 혐오와 멸시를 묵묵히 팔짱만 낀 채 방조하는 것이 가능했겠는가. 그들은 여성을 사랑하지 않는다. 마치 할리 퀸을 대하는 조커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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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자 정희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안다(know)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라고 생각한다.안다는 것, 더구나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삭제된 역사를 알게 된다는 것은, 무지로 인해 보호받아 온 자신의 삶에 대한 부끄러움, 사회에 대한 분노, 소통의 절망 때문에 상처받을 수 밖에 없는 일이다."
<18>
나는 사랑받는 삶 대신 나의 삶을 택하기로 결정 내렸다.<
책 읽고 단어나 문장들 공책에 옮겨적곤 하는데
이번에 너무 많아서 ㅋㅋ워드로 쳐야겠다 했는데
이왕이면 토리들이랑 한번 다같이 읽어봤으면 해서 올렸어.
저자는 엘리라는 분이고, 아마 영어 이름인것 같음 해외에서 거주하시는 거 보니.
나중에 시간날 때 한번 보길 바라.
가독성도 좋고 해학과 풍자도 있어서 피식피식 웃게 되더라
덧붙여서, 책 제목처럼 연애를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자유로운 선택과 권리가 아니라 "의무"로 여기고
각종 압박감과 스트레스를 받는 토리들이 있다면 더더욱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