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정원

우리 오른손 집게손가락 끝에 있는 탄소 원자 하나는 먼 옛날 우주 어느 별 내부의 핵융합 반응에서 만들어졌다. 그 탄소는 우주를 떠돌다가 태양의 중력에 이끌려 지구에 내려앉아, 시아노박테리아, 이산화탄소, 삼엽충, 트리케라톱스, 원시고래, 사과를 거쳐 내 몸에 들어와 포도당의 일부로 몸속을 떠돌다, 손가락에 난 상처를 메우려 DNA의 정보를 단백질로 만드는 과정에서 피부 세포의 일부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일지 모른다.
이렇게 우리는 원자 하나에서 우주를 느낀다.

물리학에서는 세상을 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하나는 지금 이 순간의 원인이 그다음 순간의 결과를 만들어가는 식으로 우주가 굴러간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작용량을 최소로 만들려는 경향으로 우주가 굴러간다는 것이다. 두 방법은 수학적으로 동일하다. 동일한 결과를 주는 두 개의 사고방식인 것이다. 후자에 대해 우주의 '의도'라고 부르고 싶은 것은 신의 존재를 믿는 인간의 본성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일어난 일을 인간이 해석하는 방법일 뿐이다. 두 경우 모두 세상은 수학으로 굴러간다. 수학에 의도 따위는 없다.

의미나 가치는 인간이 만든 상상의 산물이다. 우주에 인간이 생각하는 그런 의미는 없다.
그렇지만 인간은 의미 없는 우주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는 존재다. 비록 그 의미라는 것이 상상의 산물에 불과할지라도 그렇게 사는 게 인간이다.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게 인간이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상상의 체계 속에서 자신이 만든 행복이라는 상상을 누리며 의미 없는 우주를 행복하게 산다. 그래서 우주보다 인간이 경이롭다.

[떨림과 울림 _김상욱]



자기 삶의 저자인 여자는 웬만큼 다 미쳐 있다.

이것은 대단히 어렵고 엄청나게 두려우며 또한 결정적인 선택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과거 자체는 바꿀 수 없지만, 현재와 미래는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고통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겠지만, 이야기의 결말은 아직 맺어지지 않았다.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_하미나]



꽃이 지고 열매가 떨어진 여름의 벚나무가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다. 봄이 아련한 줄 몰랐고 여름이 반짝이는 줄 몰랐다. 가을이 따사로운 줄 몰랐고 겨울이 은은한 줄 몰랐다. 아무것도 몰랐다. 이렇게는, 살았다고 할 수 없겠지. 살아 있다고 할 수 없겠지. 진경은 혼자 중얼거렸다.

[사하맨션 _조남주]



"들어가는 길이 있으면 나가는 길도 있지." 이런 말은 주문이나 기도를 닮았다. 길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길이 있다고 믿어야 일단은 걸을 수 있으니까. 좌절하지 않게 하려고 우리를 길 위에 세운다. 일단 걸을 수 있는 데까지 걷다 보면, 정말 무슨 수가 생길 수도 있다. 이걸 낙관이라고 불러야 할지, 희망이라고 해도 되는지 잘 모르겠다. <오즈의 마법사>는 해피 엔딩이었다.

언젠가. 나중에. 그러니까 일단 지금은 살아내라는 응원.
아득하고 먼 기도문과 같은 여행이라는 단어.
결국 이루어지지 않은 "같이 여행 가자" 를 마음속에 품고 사는 사람은 여행지에서 떠나보낸 사람의 그림자와 동행한다.

[여행의 말들 _이다혜]



"사람들은 룩을 만만하게 봐. 룩은 직선으로만 움직이지. 사람들은 퀸과 나이트, 비숍만 감시해. 왜냐하면 그 기물들은 교활하거든. 하지만 널 무너뜨리는 건 대부분 룩이야. 직선으로 움직이는 건 보기보다 간단하지 않아."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_매트 헤이그]



매 순간 '방향'을 선택한다. 행복을 목표로 삼는 방향이 아니라, 앞에 펼쳐진 모든 가능성 중에 가장 선한 길을 가리키는 화살표를 따른다. 그 둘은 처음에는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끝내 행복은 선에 속할 것이다.
그러니 역시 '행복'이라는 낱말은 없어도 될 것 같다. 나의 최선과 당신의 최선이 마주하면, 우리는 더는 '행복'에 기댈 필요가 없다.

절망스럽게도 영원은 인간이 가질 수 없는 시간의 범위 안에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적어도 나에게는) '지속'의 개념, '지속'에 대한 동경이 필요하다.

[시와 산책 _한정현]



"세상은 다정한 사람들 덕분에 유지되고 있는 게 분명해."

[재와 물거품 _김청귤]



그냥 다 뭐 어때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무렇게나 말하고 뒤죽박죽 섞어 말하고 이 얘기 저 얘기 붙여서 말하고말도 안 되는 얘기 하고 그런 거 너무 재밌다. 실제로 우리 사는 것도 다 이렇게 엉망이다.

그냥 아무렇게나 재밌게 살고 싶을 뿐이다.

[이웃집 퀴어 이반지하 _이반지하]



어른은 다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회복하는 힘이 자신에게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나도 다치고 싶지 않은 어른이 이미 되어 있다. 다치고 싶지 않다고 해서 안전함만을 욕망해서는 안 된다고 매일매일 스스로를 설득하며 살고 있다.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_김소연]



"나도 알아요. 아인슈타인은 낄 데 안 낄 데 모르고 아는 척하기 좋아하는 인간이죠. 신은 주사위를 던질 뿐 아니라 룰렛도 아주 좋아해요. 블랙잭은 물론이고. 심지어 가끔 포커도 쳐요. 생각해 봐요. 도박꾼이 아니라면 어떻게 인간 같은 족속을 만들 생각을 했겠소?"

"전적으로 감정에 의존해서 그런 판단을 내렸다는 말입니까?" 내가 놀라 묻는다.
하인츠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아니, 그럼 그것 말고 믿을 게 뭐가 있소? 감정만큼 구체적이고 생생한 건 없소. 그래서 사람들이 지식이 아닌 사랑과 행복, 우정 같은 걸 동경하는 거 아니겠소?"

[그리고 신은 얘기나 좀 하자고 말했다 _한스 라트]



아이들은 냉정한 현실과 잔혹한 어른들 사이에서 좌충우돌하며 서서히 성숙하고 배워나간다. 우리에게 필요한 진짜 영웅은 하늘을 날거나 불을 뿜는 존재가 아니라, 불합리하고 모순된 현실에서 눈 돌리지 않고 고통받는 타인에게 손을 내밀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보이지 않는 것에 의미가 있다 _김혜남]



우리는 그렇게 모여서 함께 망가지고 고장 나고 그러다 한 사람씩 사라질 것을 예감했으나 이른 포기의 달콤함 같은 것이 깃들어 있어서 그리 무거워지진 않았다. 열개의 인디언 인형처럼 하나씩, 운이 좋으면 길게 머물 것이고 아니라면 순식간에 사라질 것이다. 순서를 기다리면서 담담하게 먹고 마시고 생일파티를 하고 경조사를 챙겼다. 살아진다는 어른들의 말에 진저리를 내면서도 살아졌다.

[이만큼 가까이 _정세랑]



아무도 모르는 게 당연해. 열광하던 것들이 금세 무가치해질 날이 올지도 몰라. 하찮게만 보던 게 무시무시하게 중차대해질지도 모르고. 열광하는 마음이라면 천천히 식길, 하찮게 보던 시선을 대수로운 시선으로 바꿀 수 있길, 바랄 뿐이야.

"지금도 생각해. 딱 한 사람만 만나면 된다고. 그렇게 만나 둘이 되면 그땐 '우리'가 될 거니까."

네가 어서 가라고 손짓해도 이젠 먼저 가지 않을 거야. 네가 자꾸 괜찮다고 해도 절대 안심하지 않을 거야. 널 계속 귀찮게 할 거야. 아무 일 없는 날에도 창문을 두드릴 거야. 별사탕도 없는 퍽퍽한 건빵을 날릴 거야. 사는 게 씁쓸할 때마다 달콤한 슈크림빵을 내밀 거야. 그럭저럭 불순한 것들을 너와 함께 먹어치울 거야. 그러니까 너도 날 계속 귀찮게 해줘.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 _황모과]



아타, 이걸 기억해.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을 벗어나면 이런 참극이 일어난다는 걸. 그리고 우리가 이 일을 목격했다면 그 이유가 있을 거다, 우리가 할 일이 뭔지 기억해.

[시간을 멈추는 소녀 _최정화]



여행자들은 다 같이 숨을 죽이고 바람 소리, 연필이 긁히는 소리,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눈앞의 별안개가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고, 빛과 그림자가 변화하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바람조차 완전히 멈추었고, 정적 사이에 사각사각 무언가를 쓰거나 그리는 소리만이 끼어들었다. 리키는 가만히 그 소리를 들으며 포착할 수 없는 순간을, 언젠가는 결국 사라지고 말 순간을 지켜보았다.

[포착되지 않는 풍경 _김초엽]



"나는 너도 내 조카도 그냥... 좀 생각 없이 살았으면 좋겠어. 생각 많이 해 봤자 뭐 해? 이렇게 이상하게 굴러가는 세상에. 우울하기나 하지. 안 그래?"

[스노볼 드라이브 _조예은]



"나도 어느 순간 깨달았지. 싫은 놈들이 망해버려야지, 세계가 다 망할 필요는 없다고. 그때부터 나는 오래 살아서, 절대 망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단다. 그 대신 싫은 놈들이 망하는 꼴을 꼭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지."
"성공 하셨나요?"
"글쎄. 그런 것 같지는 않아. 그 놈들도 아직 잘 살고 있는 걸 보면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덕분에 살아가며 다른 좋은 것들을 많이 볼 수 있었지. 전부 망해버렸다면 아마도 못 봤을 것들이지."

지수는 밤새도록 바위에 앉아서, 숲을 가득 채운 푸른 먼지들을 보았다. 아름다움 외에는 아무런 기능이 없는, 그러나 결국 제거되지 않은 푸른빛들을.

[지구 끝의 온실 _김초엽]



그런데도. 그런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밤. 나를 오해하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이용할지도 모를, 그리하여 나를 낙담하게 하고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은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고 나의 신에게 조용히 털어놓았던 밤이 있었다.

[고백 _최은영]



"무녀리라는 말은, 문을 연 아이라는 뜻이야."

어쩌면 너는 저 바다의 부력 속에서는, 혹은 우주의 무중력 속에서는 더는 그 지독한 멀미를 하지 않을 지도 몰라. 처음으로 뭍으로 올라왔던 양서류의 먼 조상처럼, 처음으로 활강이 아니라 날갯짓을 했던 새들의 먼 조상처럼, 억센 팔로 나무를 기어오르는 대신 처음으로 두 발로 땅 위에 섰던 인간의 조상처럼, 너에게는 다른 세계가 있는 거니까. 처음으로 문을 열었던 누군가의, 나약하고 작지만 끈질기게 버텨 나가는 힘이, 그렇게 새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는 거니까.

[우주 멀미와 함께 살아가는 법 _전혜진]



별들은 멸망을 두려워하지 않아. 그들은 영원을 꿈꾸지 않아. 그런 것을 바라는 것은 오직 너희뿐이었단다.

그러니 나의 꽃아, 문을 열어라.
나는 내게 주어진 마지막 권한을 다해, 인간이 만들어 낸 최후의 세계를, 아직 침몰하지 않은 이 배의 모든 권한을 인간인 너에게, 나의 아이인 너에게 돌려주었다. 먼 훗날 언젠가, 이 세계가 품어 안은 기억들이 그저 신화와 전설로만 남는다 하더라도,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열고 나아간 너의 이름이 신의 이름으로 기록되도록. 그렇게 굳게 닫힌 세계의 문을 열어가도록.

[아틀란티스 소녀 _전혜진]



"어린 게 왜 홧병이 나. 뭘 그렇게 속으로 삭였어. 왜 너까지 그래. 아서라. 참지 마. 싫은 게 있으면 싫다고 해. 상대방에게 말해도 돼. 참고 참아서 죽은 여자들이 이 땅 아래 이미 너무 많아. 저 우물 안에도 한 명 있지 않느냐. 그러니 아가. 넌 그리 하지 마라."

[아홉수 가위 _범유진]



"누군가가 이 거짓에 일생을 바쳤어. 일생을 바쳐 대사를 입력했고, 일생을 바쳐 내가 사람처럼 보이기를 원했어. 내가 그의 무의미하고 고독한 인생에 함께한 존재였으며, 또한 그가 존재했다는 유일한 흔적이야. 그러니 나는 사라지는 순간까지 이 거짓을 지켜내야만 해. 이 거짓이 진실보다 위대하고, 영원히 지켜져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여자는 고개를 숙였다.
"어느 쪽이든, 나는 같은 대답을 할 수밖에 없어."

[스크립터 _김보영]




불쾌함을 피하려고 소중한 연결까지도 놓치기에는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에너지가 아주 크다.

내년에는 또 그 이후에는 우리가 어쩌지 못하는 무슨 나쁜 일들이 생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있자, 우리가 애써 좋은 순간들을 발명해내자,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일이 되어주자고.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 _황선우]






나 혼자 상반기 결산하는 의미로 1~6월 동안 책 읽으면서 저장한 문장들 쭉 읽어봤는데 그 중에 삶에 관한 문장들 같이 읽고 싶어서 뽑아 왔어!
토리들도 좋았던 문장 있으면 공유 해줄래?
그리고 요즘 많이 더운데 더위 조심하고! 건강하게! 마음에 와닿는 책 많이 만나는 하반기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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