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간 토지에 나오는 신여성들 부분만 모아서 글 찌려고 했었는데
어제 알쓸신잡에서 페미니즘이랑 박경리 선생님 얘기가 나왔다길래 이때싶 올려보는 글.
발췌한 내용 대부분의 배경이 1919년~1920년 쯤인데 100년 전 여성들의 고민에 왜 이렇게 공감가는 부분이 많은 걸까.
같이 읽어보고 얘기 나누면 좋을 것 같아서 글 쪄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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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풍조가 그런 모양이더라만 신학문을 한 남성들이 무식한 조강지처를 내치고 자신의 반려로서 신여성과 결혼한다는 것을 정당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애정도 없이 조혼하여, 하긴 조선의 남자치고 조혼 아닌 사람은 거의 없으나, (중략)
그러나 무책임하게 시류를 쫓아서 마치 껍데기만 핥고서 남녀평등을 부르짖는 신여성과 마찬가지로 이혼의 자유, 결혼의 자유를
내세운다면 그와 같이 경박한 일이 어디 있겠어? 개중에는 기방 외입과 마찬가지 기분으로 신여성이란 색다르니까, 한단 말이야. 네
앞에서 할 말은 아니다만 기생첩에다 신여성첩도 두자는 놈이 실제로 있다구. 결국 호기심의 대상이다 그거야. (토지, 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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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행 하고 돌아오면 그땐 양여성이라 하겠네요.”
“그게 무슨 소리야?”
“신여성, 신여성 그러구들 하니까 말이유.”
“못되어 배 아프지. 이죽거리는 사내들, 그거 다 접근할 용기가 없으니까 그러는 게야. 골샌님들은 여자 시중드는 게 싫구, 하지만 이제는 여자들도 남자들 시중받을 시대라구.” (토지, 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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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나는 죽도 밥도 아닌 것만은 확실해. 교회에 가도 마찬가지, 사실 난 전심전력으로 기도해본 일이 없어. 입속으로 기도문을 욀
때도 그렇고 마음속으로 기도할 때도 그래. 어떤 때는 말꼬리를 놓치고서 그걸 찾다 보면 기도시간은 끝나 있고,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의문을 가져본 일도 없고 확신해본 일도 없고, 아버님이 살아 계실 적에 열심히 공부해서 칭찬받고 집에 들면 집안 살림
도와주어서 칭찬받고 그것이 내 전부였어, 그것이.
교장 선생님은 여성교육의 선구자라 하셨다. 여성교육의 선구자.
선구자 될 생각도 없으면서 뭘 여자가 시집이나 가지, 하면 불쾌해진다. 오라버니 말대로 자발적으론 아무것도 못하면서 최고교육을
받았다는 자부심은 있어서, 그 무거운 짐짝 같은 선생, 직업, 여성교육의 선구자, 그걸 끌고 막연한 독신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역시
비참하다. 남은 뭐라건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는 선혜언니 편이 나보다는 훨씬 나아. 혼자 살려고 교사질을 한다는 것은 참말 따지고
보면 우스운 얘기야. 후취자리보다 나을 것 한 푼 없지. 오라버니 말씀이 옳아. 우스운 일이야. 도시 우스운……. ' (토지,
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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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히 얘기는 선혜와 정상조 사이에서 오고갔는데 명희를 보는 노골적인 눈빛과는 다르게 정상조는 여자를 깎아내리는 화제만 고르는 것이었다.
“소위
신식 교육이라는 것을 받은 여자들, 해외유학을 한 최초의 여자들을 보면은 묘한 공통점이 있지요. 상민 혹은 천민의 딸들이거나
아니면 친일파의 딸이란 말입니다. 여의사였던 박에스터, 하란사, 배정자 이 세 여자를 놓고 볼 때 박에스터는 목사관 하인의
딸이요, 하란사는 인천 감리(仁川監理)의 소실이며, 배정자 그 계집은 무당의 딸이라고도 하고 출생이 애매해요. 그리고
윤효구(尹孝具)의 딸 윤정원(尹貞媛)과 일진회 회장 윤시병(尹始炳)의 딸 윤정자(尹貞子)는 친일파의 딸인데 이들은 그러니까 모두
1900년 이전에 미국과 일본에서 유학한 여자들 아닙니까? 그러니 시초부터, 조선이라는 나라 사정에서 본다면 권위를 세울 수 없는
존재였다고도 할 수 있지요.”
높지 않은 음성으로 명희를 슬금슬금 쳐다보며 말하는 정상조는 뭐 기껏해야 역관의 딸인데 높이 좌정할 것 뭐 있나, 어느 모로 보나 내가 과분한 상대라는 것을 알아차려야지, 하는 저의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중략)
“이제, 이제, 고만하세요. 아이구 골치야.”
선혜는 팔을 휘휘 내둘렀다.
“나도 그만둘 작정이오.”
“제발
여자 연구는 그만하구 공부나 열심히 해서 고등문관에 패스하시구요, 장차 판검사가 됐을 때 어떻게 하면 민족반역자란 소리도 안
듣고 출세도 하고 하겠는가, 지금부터 그 연구나 해두는 게 좋을 거예요. 시시한 여자들 땜에 시간 허비할 것 없어요.”
“그건
그렇지가 않지요. 나도 어차피 장가를 들어야 하고 또 자녀도 두어야 하니까 알맹이 없는 콧대만 가지고 오는 여자는 문제거든.
그렇다고 해서 콧대 없는 무식한 처녀 데려올 수는 없는 일이고 해서 신여성이라는 부류의 여자들을 생각해본 결과 의외로 문제는
간단치 않더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신여성 중에서 한 푼만 정상조 씨보다 얕으면 되겠네요. 하지만 그것 참
어렵겠어요. 한마디만 덧붙이겠는데 출신신분이 어쩌구저쩌구 하지만요, 정상조 씨 입장에서 본다면 여자 박에스터, 하란사는
거물이에요. 정상조 씨 열 가지고도 못할 일 했으니까요.” (토지, 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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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선생님한테 무슨 볼일이 있어 오시었소?”
이정백이 실실 웃으며 묻는다.
“이정백 씨가 그건 알아 뭐하실래요?”
“글쎄올시다.”
“강선혜가 권오송 씨를 짝사랑한다, 소문낼려구요?”
“누굴 참샌 줄 아시오?”
“거물이 아닌 건 나랑 마찬가지겠지만 남자가 참새여서는 너무 귀엽잖겠어요?”
“허 참.”
“어때요? 잇몸이 근질근질하신가요?”
“남자가 아닌 것이 유감천만이군.”
“장갑을 던질 텐데 말씀이죠? 영국까지 유학은 안 가신 줄은 알지만 당신 꽤 신사군요.”
“이럴 때 어줍잖게 배운 것이 여자한테 유죄거든.”
“어줍잖게 지식인인 탓으로 주먹을 휘두르지 못해 참으로 유감이오. 그보다 여자, 여자 하는 사내치고 잘난 놈 못 봤으니까.”
이정백의
얼굴이 시뻘게진다. 명확하게 판정패다. 여자가 대등하게 싸우려 들면 망나니처럼 주먹을 휘두르든가 말재주를 부릴밖에 없는데, 두
경우는 다 이로울 것이 없고 사내가 치사스럽게 되게 마련이다. 애초 무관심했으면 좋았을 것을 깔보고 들었기 때문에 당한
봉변이었다. (토지, 1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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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을 쓸 수 있는 남자였다면…… 모두
생쥐 같아요, 조선남자들 말예요. 여자가 조금만 잘난 소릴 하면 그걸 못 삭여서 몸살이 난다니까요. 저희들 영역을 침해하는
원수처럼 말예요. 그야말로 얼마나 자신이 없음 그러겠어요? 얼굴 하나 치켜들고 여기저기 미낄 던지는 여자도 치사하지만 남자들은
그보다 더 옹졸하구 인색하구, 여자는 오로지 남자의 노예요 노리갯감으로 작정하고 있는 게 조선의 남자들이란 말이에요. 해외에
나가서 교육받은 남자도 마찬가지예요. 아니 더했으면 더했지, 그러고도 입센의 『인형의 집』이 어떻고 노라가 어떻고 천연덕스럽게
말을 하니 기차지요.” (토지, 1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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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하는 그 틈새 일부
여자들은 달음박질로 새 교육을 받았는데 명희 너도 나도 그 부류에 속하지만 세상의 인식이 달라지기도 전에 남자가 여자의 인격을
인정하기도 전에 이런 새로운 여자들이 나왔다는 것은, 소위 신여성들인데 공중에 휭 떠버린 상태가 될밖에 없었지. 서울의 강선혜
같은 여자가 그 대표적인 거라 할 수 있겠고.
명문거족의 딸들은 기왕의 누려온 그 특권으로 해서 새로운 학문도
시집가는 혼수같이 되어 전과 다름없는 며느리 아내로 낙착이 되었지만 그럴 수 없는 계층의 여자들은 오히려 신분이 떨어져 버린
느낌이야. 남의 소실 후처댁이 심지어는 광대취급이고 소수가 사회 일각에서 뭔가 해보겠다고 가시밭길을 걷는데 말로는 존경한다,
평가하는 데는 교육받은 여자라는 것이 보탬이 되기도 하고 남과 다르다는 것 때문에 호기심의 대상이 된다는 거지. 호기심의 대상으론
시골이라고 다를 게 없어. 더했음 더했지. 구경거리가 된다는 것을, 호기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우쭐해서 좋아하는 속 빈
신여성도 많긴 많았지만 옛부터 구경거리가 된다는 것은 천한 거였어. 넌 줄곧 온실에서만 살아왔으니까, 어느 정도 견디어낼는지……
내가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담을 쌓아도 제발 내 앞만 가리는 이기주의자만은 되지 말아라 그 말인데, 노처녀나 이혼녀나 과부나
편협하고 옹골차고 물기 없이 말라서 자기 둘레만 깨끗이 하고 자기 식량만을 챙기는 그런 습성은 밖에서 오는 핍박 때문에 형성된
것이지만 그것을 이겨야 해. 더한 정신적 고통을 받겠지만 우리도 살아 있다는, 살아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거야. 명희야, 우리
물기 빠진 나무는 되지 말자. (토지, 14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