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밝은 밤이었습니다.
내 집 유리창 밖으로 흘러가는 강물, 그 강가로 만돌린을 치며 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군가 하고 내다보니까, 그는 내가 사랑하는 소녀 연이였습니다.
내가 내다보고 있는 걸 보았는지, 연이는 만돌린을 번쩍 들며 나를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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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는 거침없이 풀밭에 앉으며 내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선생님, 저 달빛을 말예요, 장미꽃 속에다 짜 넣어서 비단실을 뽑을 수 없을까요? 그 비단실로 옷을 지어 입고 춤을 추고 싶어요. 아! 얼마나 아름다울까? 얼마나 춤이 잘 추어질까?”
연이가 원하는 장미꽃과 달빛의 옷을 내가 만일 만들어 줄 수만 있다면, 내 귀여워하는 연이는 화려한 춤을 출 것입니다. 그러면 연이가 얼마나 좋아할까요? 나는 고개를 끄떡이며 한참 생각하다가 내 안경을 벗어 들고,
“오냐! 어디 날 따라와 봐. 장미꽃에 달빛을 넣어서 실을 뽑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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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정말 그렇게 해 주세요. 그러면 저는 멋진 춤을 보여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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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와 나는 장미꽃 송이를 붙들고 안경으로 달빛을 비췄습니다.
은빛 같은 달빛이 하얀 장미꽃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연이가,
“아! 선생님. 꽃 속에서 은실이 나와요. 어머나! 여러 가닥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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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꽃 속에서 나오는 은빛 실들을 잡아당겼습니다. 은실은 술술술술 자꾸자꾸 나왔습니다.
‘이게 꿈이 아닐까? 꿈이 아니고서야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을 텐데…….’
하고 생각했으나, 세상에는 꿈 같은 일이 얼마든지 있으니 꿈이 아니고서도 있을 수 있으리라고도 생각되었습니다.
술술술 나오는 은실이 장미 꽃나무 아래 수북이 쌓이는가 했더니, 어느새 그 실은 하얀 무용복으로 변해 있지 않겠습니까! 처음 보는 아름다운 비단옷이었습니다.
“연아! 자, 이 옷을 입어라. 이걸 입고 춤을 추어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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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는 인제 나를 잊어버린 듯 춤추기에만 정신이 팔렸나 봅니다. 마구 미친 듯 춤을 추며 앞으로 앞으로 뛰는 듯이 갔습니다.
나는 그 연이를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도랑물이 있으면 징검다리를 찾아가서 건너야 하고, 언덕이 높으면 가까스로 뛰어올라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연이는 어떻게 가는 것일까요. 도랑물이나 언덕이나 거침없이 춤추며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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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연이를 잃어버릴 것만 같아서 겁이 덜컥 났습니다. 연이를 잃어버리면 그야말로 큰일입니다.
천진하고 귀엽고 노래와 같은 아이, 나비와 같이 춤추는 아이, 그 아이가 미친 듯 춤을 추며 이 밤중에 어디로 가 버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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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야? 누구, 어디서 웃는 거야?”
그러자 어린아이의 말소리가 났습니다.
“우리들은 꽃이에요. 저를 보아요. 저는 오랑캐꽃이에요.”
“꽃이라? 꽃이 어떻게 말을 하나?”
내가 발아래를 내려다보니 쬐꼬만 얼굴을 한 아기들이 풀밭에서 나를 쳐다보고 웃고 있습니다. 꽃들이 아기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달이 밝은데 우리가 말을 좀 하면 어때요. 달빛과 장미꽃으로 옷을 지어 입고 춤을 추는 아가씨도 있는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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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도 춤을 추어 보세요. 그러면 그 아가씨한테 갈 수 있을 거예요.”
꽃아기들이 일제히 아아아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춤을 출 줄 모르면서도 용기를 내어 춤을 추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나의 손과 다리는 발레 춤을 추면서 숲 쪽으로 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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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선생님! 여기가 어디예요?”
“여긴 숲 속이야, 넌 춤을 추면서 세상 모르고 예까지 온 거야.”
“아! 참 재밌었어. 선생님이 만들어 주신 달빛과 장미의 옷을 입고 저는 정말 재미있게 춤을 추었어요. 꼭 꿈을 꾼 것만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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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좋아하는 사람은 꿈 같은 세계에서 즐거이 살 수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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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선생님, 고맙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선생님을 위해서 제가 노래를 불러 드릴까요?”
그러고는 연이는 내 품에 안긴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노래는 내가 좋아하는 미뇽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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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의 노랫소리에 맞춰, 이번엔 내가 연이를 얼싸안고 춤을 추며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이원수, 춤추는 소녀(19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