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락없음주의@@@@
- 종의 기원, 정유정
해진의 눈이 연속 촬영이라도 하듯 내 눈을 서서히 가로질렀다. 시선의 움직임이 너무 더뎌서, 내 동공이 태양계만큼이나 넓은 듯한 착각에 빠졌다.
- 한 말씀만 하소서, 박완서
<인생은 풀과 같은 것, 들에 핀 꽃처럼 한번 피었다가도 스치는 바람결에도 이내 사라져 그 있던 자리조차 알 수 없는 것. - 시편 15~16>
주여, 그렇게 하찮은 존재에다 왜 이렇게 진한 사랑을 불어넣으셨습니까
- 야만적인 앨리스씨, 황정은
뭐가 유별나게 거슬렸는지 그를 도로 마당으로 끌어내서 몸을 밀치고 당기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럴 때가 있고 그럴 땐 멈추지 않는다. 그럴 때 그녀는 어떤 사람이라기보다는 어떤 상태가 된다. 씨발됨이다. 지속되고 가속되는 동안 맥락도 증발되는, 그건 그냥 씨발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씨발적인 상태다. 앨리시어와 그의 동생이 그 씨발됨에 노출된다. 앨리시어의 아버지도 고모리의 이웃들도 그것을 안다. 알기 때문에 모르고 싶어하고 모르고 싶기 때문에 결국은 모른다.
입을 찢었으면 먹든가 죽이든가. 입을 찢어놓고 도로 놓아주며 가치 있는 목숨 운운하는 인간은 아무래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 침이 고인다, 김애란
나는 어머니가 해주는 음식과 함께 그 재료에 난 칼자국도 함께 삼켰다. 어두운 내 몸속에는 실로 무수한 칼자국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혈관을 타고 다니며 나를 건드린다. 내게 어미가 아픈 것은 그 때문이다.
신림, 하고 발음할 때 내 혀는 파랗게 물든다. 구파발이라 읊조리면 내 가슴 어딘가에 꽂힌 붉은 깃발이 마구 펄럭이는 것처럼. 그것은 진짜 신림 진짜 구파발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어머니는 샛방의 주인아주머니가 우리에게 얼마나 잘해주었는가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갚을 순 없어도 잊어선 안 되는 일들이 있다고.
-쇼코의 미소, 최은영
한지가 생각날 때마다 나는 정원의 풀숲을 걸으며 지질시대 구분표를 암송했다. 하지만 그 암송도 한지에 대한 생각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그애는 지질시대의 모든 시기마다 숨쉬고 있었다.
상대의 고통을 같이 나눠줄 수 없다면, 상대의 삶을 일정 부분 같이 살아낼 용기도 없다면 어설픈 애정보다는 무정함을 택하는 것이 나았다. 그게 할머니의 방식이었다.
-비행운, 김애란
하지만 그 나이엔 의당 그래야 하는듯 알 수 없는 우울에 싸여 있었고, 내 우울이 마음에 들었으며, 심지어는 누군가 그걸 알아차려주길 바랐다. 환영식 날, 잔디밭에 모인 무리에서 슬쩍 빠져나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내가 거기 없다는 걸 통해, 내가 거기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은 마음.
-인간실격, 다자이오사무
겁쟁이는 행복마저도 두려워하는 법입니다. 솜방망이에도 상처를 입는 것입니다. 행복에 상처를 입는 일도 있는 겁니다. 저는 상처 입기 전에 얼른 이대로 헤어지고 싶어 안달하며 예의 익살로 연막을 쳤습니다.
-여름의 끝, 윌리엄 트레버
“안 먹어도 돼요.” 엘리는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자른 빵을 그가 잘랐기 때문에 먹었고, 그가 따른 차도 마셨다.
- 이방인, 알베르 카뮈
보기에는 내가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그보다 더한 확신이 있어.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렇다, 나한테는 이것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그것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굳게 붙들고 있다.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또 언제나 옳다.
- 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너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
... 나는 고의로 그 말을 했다. 너처럼 부족함 없이 자란 애가 우리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느냐고, 네가 아무리 사려 깊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네가 뭘 알아, 네가 뭘. 그건 마음이 구겨져 있는 사람 특유의 과시였다.
아마 미주는 자신을 안타까이 보는 무당의 그 눈빛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타인의 얼굴 앞에서 거스를 수 없는 슬픔을 느끼니까. 너의 이야기에 내가 슬픔을 느낀다는 사실이 너에게 또다른 수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은 채로.
애쓰고 애쓰고 또 애써온 시간이 그 애의 얼굴에 그대로 남아있어서 나도 그애를 대할 때는 불성실하고 싶지 않았다. 무성의하게 공무가 이런저런 사람이라고 단정하고 싶지 않았다.
- 눈 먼 자들의 국가, 김애란 외
그러니 ‘이해’란 타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 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에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나가는 과정일지 몰랐다.
-계속해보겠습니다, 황정은
"편부모가 아닌 상황이라면 부족하지 않아? 편부모가 아니라면 무조건 사랑받으면서, 건강하게 자라게 되는거야? 자기들은 편부모 상황에서 자라지 않은 건강한 사람들이라서 그런 것을 다 걱정하고 있는거지? 그런게 건강한 거라면 나는 건강하지 않아도 좋아. 나나도 건강하지 않아도 좋아."
한편 생각합니다. 무의미하다는 것은 나쁜 걸까.
소라와 나나와 나기 오라버니와 순자 아주머니와 아기와 애자까지 모두, 세계의 입장에서는 무의미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의미에 가까울 정도로 덧없는 존재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소중하지 않을 걸까, 생각해보면 도무지 그렇지는 않은것 입니다.
계속해 보겠습니다.
- 종의 기원, 정유정
해진의 눈이 연속 촬영이라도 하듯 내 눈을 서서히 가로질렀다. 시선의 움직임이 너무 더뎌서, 내 동공이 태양계만큼이나 넓은 듯한 착각에 빠졌다.
- 한 말씀만 하소서, 박완서
<인생은 풀과 같은 것, 들에 핀 꽃처럼 한번 피었다가도 스치는 바람결에도 이내 사라져 그 있던 자리조차 알 수 없는 것. - 시편 15~16>
주여, 그렇게 하찮은 존재에다 왜 이렇게 진한 사랑을 불어넣으셨습니까
- 야만적인 앨리스씨, 황정은
뭐가 유별나게 거슬렸는지 그를 도로 마당으로 끌어내서 몸을 밀치고 당기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럴 때가 있고 그럴 땐 멈추지 않는다. 그럴 때 그녀는 어떤 사람이라기보다는 어떤 상태가 된다. 씨발됨이다. 지속되고 가속되는 동안 맥락도 증발되는, 그건 그냥 씨발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씨발적인 상태다. 앨리시어와 그의 동생이 그 씨발됨에 노출된다. 앨리시어의 아버지도 고모리의 이웃들도 그것을 안다. 알기 때문에 모르고 싶어하고 모르고 싶기 때문에 결국은 모른다.
입을 찢었으면 먹든가 죽이든가. 입을 찢어놓고 도로 놓아주며 가치 있는 목숨 운운하는 인간은 아무래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 침이 고인다, 김애란
나는 어머니가 해주는 음식과 함께 그 재료에 난 칼자국도 함께 삼켰다. 어두운 내 몸속에는 실로 무수한 칼자국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혈관을 타고 다니며 나를 건드린다. 내게 어미가 아픈 것은 그 때문이다.
신림, 하고 발음할 때 내 혀는 파랗게 물든다. 구파발이라 읊조리면 내 가슴 어딘가에 꽂힌 붉은 깃발이 마구 펄럭이는 것처럼. 그것은 진짜 신림 진짜 구파발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어머니는 샛방의 주인아주머니가 우리에게 얼마나 잘해주었는가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갚을 순 없어도 잊어선 안 되는 일들이 있다고.
-쇼코의 미소, 최은영
한지가 생각날 때마다 나는 정원의 풀숲을 걸으며 지질시대 구분표를 암송했다. 하지만 그 암송도 한지에 대한 생각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그애는 지질시대의 모든 시기마다 숨쉬고 있었다.
상대의 고통을 같이 나눠줄 수 없다면, 상대의 삶을 일정 부분 같이 살아낼 용기도 없다면 어설픈 애정보다는 무정함을 택하는 것이 나았다. 그게 할머니의 방식이었다.
-비행운, 김애란
하지만 그 나이엔 의당 그래야 하는듯 알 수 없는 우울에 싸여 있었고, 내 우울이 마음에 들었으며, 심지어는 누군가 그걸 알아차려주길 바랐다. 환영식 날, 잔디밭에 모인 무리에서 슬쩍 빠져나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내가 거기 없다는 걸 통해, 내가 거기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은 마음.
-인간실격, 다자이오사무
겁쟁이는 행복마저도 두려워하는 법입니다. 솜방망이에도 상처를 입는 것입니다. 행복에 상처를 입는 일도 있는 겁니다. 저는 상처 입기 전에 얼른 이대로 헤어지고 싶어 안달하며 예의 익살로 연막을 쳤습니다.
-여름의 끝, 윌리엄 트레버
“안 먹어도 돼요.” 엘리는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자른 빵을 그가 잘랐기 때문에 먹었고, 그가 따른 차도 마셨다.
- 이방인, 알베르 카뮈
보기에는 내가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그보다 더한 확신이 있어.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렇다, 나한테는 이것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그것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굳게 붙들고 있다.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또 언제나 옳다.
- 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너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
... 나는 고의로 그 말을 했다. 너처럼 부족함 없이 자란 애가 우리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느냐고, 네가 아무리 사려 깊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네가 뭘 알아, 네가 뭘. 그건 마음이 구겨져 있는 사람 특유의 과시였다.
아마 미주는 자신을 안타까이 보는 무당의 그 눈빛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타인의 얼굴 앞에서 거스를 수 없는 슬픔을 느끼니까. 너의 이야기에 내가 슬픔을 느낀다는 사실이 너에게 또다른 수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은 채로.
애쓰고 애쓰고 또 애써온 시간이 그 애의 얼굴에 그대로 남아있어서 나도 그애를 대할 때는 불성실하고 싶지 않았다. 무성의하게 공무가 이런저런 사람이라고 단정하고 싶지 않았다.
- 눈 먼 자들의 국가, 김애란 외
그러니 ‘이해’란 타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 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에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나가는 과정일지 몰랐다.
-계속해보겠습니다, 황정은
"편부모가 아닌 상황이라면 부족하지 않아? 편부모가 아니라면 무조건 사랑받으면서, 건강하게 자라게 되는거야? 자기들은 편부모 상황에서 자라지 않은 건강한 사람들이라서 그런 것을 다 걱정하고 있는거지? 그런게 건강한 거라면 나는 건강하지 않아도 좋아. 나나도 건강하지 않아도 좋아."
한편 생각합니다. 무의미하다는 것은 나쁜 걸까.
소라와 나나와 나기 오라버니와 순자 아주머니와 아기와 애자까지 모두, 세계의 입장에서는 무의미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의미에 가까울 정도로 덧없는 존재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소중하지 않을 걸까, 생각해보면 도무지 그렇지는 않은것 입니다.
계속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