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이원이 이팅에게 말했다.
“넌 아직 열여덟 살이야. 선택할 수 있어. 이 세상에 소녀를 강간하며 즐거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모르는 척 살 수 있어. 강간당한 소녀가 있다는 걸 모르는 척 살 수 있어. 다른 누군가와 공갈젖꼭지와 피아노를 공유한 적 없고, 다른 누군가와 똑같은 취향과 생각을 가진 적 없는 척 살 수 있어. 부르주아의 평화롭고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어. 정신에 걸리는 암이 있다는 것도, 쇠 울타리에 안에 정신암 말기 환자들이 모아둔 곳이 있다는 것도 모르는 척 살 수 있어. 이 세상에 마카롱과 핸드드립 커피, 수입산 문구만 있는 척 살 수 있어. 하지만 넌 쓰치가 경험한 모든 고통을 겪고, 쓰치가 그 고통에 저항하기 위해 쥐어짜낸 모든 노력을 따라할 수 있어. 너희가 태어나서 함께 지낸 시간들과 네가 쓰치의 일기에서 찾아낸 시간들과 모두 합쳐서 말이야. 넌 쓰치 대신 대학에 입학하고 대학원에 다니고, 연애를 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야 해. 퇴학을 당할 수도 있고 이혼을 할 수도 있고 유산을 할 수도 있지. 하지만 쓰치는 그렇게 흔하디흔한 시시하고 따분한 인생도 경험할 수 없어. 알아듣겠니? 넌 쓰치의 생각, 감정, 느낌, 기억, 환상, 사랑, 미움, 공포, 방황, 불안, 따뜻한 정, 욕망을 모두 경험하고 기억해야 해. 쓰치의 고통을 단단히 끌어안으면 쓰치가 될 수 있어. 그런 다음에 쓰치를 대신해서 쓰치의 몫까지 사는 거야.
이팅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원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넌 이 모든 걸 다 글로 쓸 수 있어. 속죄를 위해서도 아니고 승화를 위해서도 아니고 정화를 위해서도 아니야. 비록 네가 열여덟 살밖에 안 됐고 어느 쪽이든 선택할 수 있지만, 만약 네가 영원히 분노한다면 그건 네가 너그럽지 못해서도 아니고, 선량하지 못해도 아니야. 누구에게든 이유가 있어. 남을 강간한 사람에게조차 심리학적, 사회학적 이유가 있어. 이 세상에 아무런 이유도 필요하지 않은 건 오직 강간당하는 것뿐이야. 넌 선택할 수 있어. 사람들이 쉽게 내뱉는 동사들처럼 내려놓을 수도 있고, 뛰어넘을 수도 있고, 벗어날 수도 있어. 하지만 넌 그걸 기억할 수도 있어. 네가 그걸 기억한다면, 그건 너그럽지 못해서가 아니야. 이 세상에 그 누구도 그런 일을 당해서 안 되기 때문이지. 쓰치는 자신의 결말을 모른 채 이것들을 썼어. 지금 쓰치는 자기 자신이 사라졌다는 것조차 모르지만 일기는 또렷하게 남아 있어. 쓰치는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없는 모든 사람들-나를 포함해서-을 대신해서 그 모든 걸 감당했던 거야. 이팅, 네가 운 좋게 살아남았다는 걸 영원히 잊어선 안 돼. 넌 쌍둥이 중에 살아남은 아이야. 요즘 쓰치에게 갈 때마다 책을 읽어주는데, 그럴 때마다 왜 집에 있는 향초가 생각나는지 모르겠어. 눈물을 흘리며 타고 있는 희고 통통한 초를 볼때 마다 요실금이라는 단어가 떠올라. 쓰치가 정말 사랑했었다고. 그 사랑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새어나 왔을 뿐이야. 인내는 미덕이 아니야. 인내를 미덕으로 규정하는 건 위선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이 비틀어진 질서를 유지하는 방식이야. 분노를 표출하눈 것이 미덕이야. 이팅, 분노를 표출하는 책을 써. 생각해봐. 네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행운인지. 직접 경험하지 않고도 이 세상의 이면을 볼 수 있으니까 말이야.” P. 319~321
=======
이 문단이 작가가 소설을 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해.
주요인물은 모두 여자야. 쓰치의 단짝친구 이팅, 피해자 쓰치, 피해자였으나 살아남은 이원, 자신의 피해를 말한 궈샤오치.
읽는 내내 마오마오가 되고 싶었어.
가해자 시점이 너무 역겨웠는데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자를 이해하려 한 노력이 느껴져서 그게 너무 슬펐어. 정작 가해자는 현실에나 소설에서나 범죄 사실을 발뺌하고 있는데 말이야.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어서 이 발췌를 올려봐.
“넌 아직 열여덟 살이야. 선택할 수 있어. 이 세상에 소녀를 강간하며 즐거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모르는 척 살 수 있어. 강간당한 소녀가 있다는 걸 모르는 척 살 수 있어. 다른 누군가와 공갈젖꼭지와 피아노를 공유한 적 없고, 다른 누군가와 똑같은 취향과 생각을 가진 적 없는 척 살 수 있어. 부르주아의 평화롭고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어. 정신에 걸리는 암이 있다는 것도, 쇠 울타리에 안에 정신암 말기 환자들이 모아둔 곳이 있다는 것도 모르는 척 살 수 있어. 이 세상에 마카롱과 핸드드립 커피, 수입산 문구만 있는 척 살 수 있어. 하지만 넌 쓰치가 경험한 모든 고통을 겪고, 쓰치가 그 고통에 저항하기 위해 쥐어짜낸 모든 노력을 따라할 수 있어. 너희가 태어나서 함께 지낸 시간들과 네가 쓰치의 일기에서 찾아낸 시간들과 모두 합쳐서 말이야. 넌 쓰치 대신 대학에 입학하고 대학원에 다니고, 연애를 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야 해. 퇴학을 당할 수도 있고 이혼을 할 수도 있고 유산을 할 수도 있지. 하지만 쓰치는 그렇게 흔하디흔한 시시하고 따분한 인생도 경험할 수 없어. 알아듣겠니? 넌 쓰치의 생각, 감정, 느낌, 기억, 환상, 사랑, 미움, 공포, 방황, 불안, 따뜻한 정, 욕망을 모두 경험하고 기억해야 해. 쓰치의 고통을 단단히 끌어안으면 쓰치가 될 수 있어. 그런 다음에 쓰치를 대신해서 쓰치의 몫까지 사는 거야.
이팅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원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넌 이 모든 걸 다 글로 쓸 수 있어. 속죄를 위해서도 아니고 승화를 위해서도 아니고 정화를 위해서도 아니야. 비록 네가 열여덟 살밖에 안 됐고 어느 쪽이든 선택할 수 있지만, 만약 네가 영원히 분노한다면 그건 네가 너그럽지 못해서도 아니고, 선량하지 못해도 아니야. 누구에게든 이유가 있어. 남을 강간한 사람에게조차 심리학적, 사회학적 이유가 있어. 이 세상에 아무런 이유도 필요하지 않은 건 오직 강간당하는 것뿐이야. 넌 선택할 수 있어. 사람들이 쉽게 내뱉는 동사들처럼 내려놓을 수도 있고, 뛰어넘을 수도 있고, 벗어날 수도 있어. 하지만 넌 그걸 기억할 수도 있어. 네가 그걸 기억한다면, 그건 너그럽지 못해서가 아니야. 이 세상에 그 누구도 그런 일을 당해서 안 되기 때문이지. 쓰치는 자신의 결말을 모른 채 이것들을 썼어. 지금 쓰치는 자기 자신이 사라졌다는 것조차 모르지만 일기는 또렷하게 남아 있어. 쓰치는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없는 모든 사람들-나를 포함해서-을 대신해서 그 모든 걸 감당했던 거야. 이팅, 네가 운 좋게 살아남았다는 걸 영원히 잊어선 안 돼. 넌 쌍둥이 중에 살아남은 아이야. 요즘 쓰치에게 갈 때마다 책을 읽어주는데, 그럴 때마다 왜 집에 있는 향초가 생각나는지 모르겠어. 눈물을 흘리며 타고 있는 희고 통통한 초를 볼때 마다 요실금이라는 단어가 떠올라. 쓰치가 정말 사랑했었다고. 그 사랑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새어나 왔을 뿐이야. 인내는 미덕이 아니야. 인내를 미덕으로 규정하는 건 위선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이 비틀어진 질서를 유지하는 방식이야. 분노를 표출하눈 것이 미덕이야. 이팅, 분노를 표출하는 책을 써. 생각해봐. 네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행운인지. 직접 경험하지 않고도 이 세상의 이면을 볼 수 있으니까 말이야.” P. 319~321
=======
이 문단이 작가가 소설을 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해.
주요인물은 모두 여자야. 쓰치의 단짝친구 이팅, 피해자 쓰치, 피해자였으나 살아남은 이원, 자신의 피해를 말한 궈샤오치.
읽는 내내 마오마오가 되고 싶었어.
가해자 시점이 너무 역겨웠는데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자를 이해하려 한 노력이 느껴져서 그게 너무 슬펐어. 정작 가해자는 현실에나 소설에서나 범죄 사실을 발뺌하고 있는데 말이야.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어서 이 발췌를 올려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