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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토리들 :)
난 얼마전에 워홀로 한국을 떠나 캐나다 시골로 왔어.
워킹홀리데이 최종 승인날짜만 나오면 되는 마지막 단계 직전에 코로나가 터져서 약 1년 2개월 동안 승인날짜만 기다리게 됐었어. 덕분에 19년도 12월에 신청했던 워홀을 21년 3월에 최종 승인받았고, 22년 2월 2차 메디컬이 만료되기 직전에 캐나다로 들어왔어.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워홀이 끝나고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재취업도 했을 그 시간동안에 나는 워홀을 포기해야할까 고민이 많아진 일들이 있었지.
사실 내가 워홀을 신청했던건 동생과 한국을 떠나기 위해서였거든.
부모님의 이혼과 재혼으로 겉으로만 멀쩡히 보였던 가정환경이 우리에게는 학대와도 같은 시간이었고, 우리의 모든 선택에는 늘 폭언과 돈돈돈, 돈의 압박이 있었어. 난 중학교때부터 한달 용돈으로 모든걸 해결했고, 동생은 엄청난 감시와도 같은 생활속에서 살았거든.
나는 고등학교부터 집과는 멀리 떨어져서 집엔 거의 잠만 자러 들어갔었고, 대학교는 친엄마의 외가와 가까운 지방대로 가서 4학년까지 기숙사 생활을 했어. 남동생은 그럴 때마다 나에게 가지말라고 했지만 나는 나만 생각하고 도망쳤어. 내가 고3때 동생은 중학생이었는데, 내가 처음부터 지방으로만 생각한다는걸 알았을 때 처음 그렇게 말하더라고. 우린 되게 말없는 사이였고, 그냥 말없이 서로 영화본다는 핑계로 가끔 내 방에서 나는 침대, 동생은 바닥에서 자기도 하다가, 그마저도 남녀끼리 한 방에서 뭐하냔 말에 가로막혀 왕래도 마음 편히 못했었는데 동생이 그렇게 말하니 마음이 너무 안 좋더라고. 결국 난 그래도 그 끔찍한 곳에 동생을 홀로 두고 먼저 도망쳤지만..
대학교 들어가서는 친엄마에게 단칸방이라도 좋으니 3명이서 같이 살자고 했지만 어느새 홀로 산 세월이 더 길어진 엄마는 거절했고(아마 금전적인 문제도 컸겠지), 나는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어학연수를 핑계로 방학때도 집에 잘 들어가지 않았어. 난 대학교를 가면서 그렇게 멋대로 집과의 연락을 줄였던것 같아. 시간이 지나서 나는 아주 작은 회사에 바로 취업을 하고 친엄마 오피스텔(원룸)에 같이 들어가 거실 생활을 했고, 동생도 지방으로 대학교를 들어갔어. 그제서야 나는 동생이랑 문화생활도 가끔이나마 같이하고, 생일 선물이랍시고 기숙사에 피자나 치킨 배달도 시켜줬지. 우린 여전히 말을 살갑게 하지 못했고, 카톡의 대부분은 누나 돈 빌려줘, 언제까지 갚을 건데? 이었는데 돈을 벌어서 이젠 더이상 부모에게 뭐 사고싶은데 돈을 더 달라고 어떻게 말해야하나 생각하지 않고도 비싼 물건이든 그렇지 않든 그 결정권이 온전히 나에게 있으니까 정말 돈을 미친듯이 쓰게되었어. 1원도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지 않을 정도였고, 거기엔 동생도 포함이었어. 그래서 나는 독립할 생각을 하지도 않고 동생은 그대로 대학교를 졸업해서 군대에 갔어. 아빠의 고집으로 ROTC 로 갔거든. 직업군인을 하길 바랐어, 부모에겐 우린 늘 한심하고 창피한 자식들이라 사회 나와서 뭐하냐는 태도였거든.
동생이 밥도 주고, 굳이 안 나와도 되고, 면회도 본인이 싫다하면 볼 수 없는 곳에 가서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왜냐면 나는 그런 생각으로 육군사관학교도 한 때 꿈꿨었거든. 그래서 동생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할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해외여행을 갈 때, 연수를 갔을 때, 교환학생을 갔었을 때 동생은 늘 부러워했고, 나는 그때마다 약속했지. 네가 제대하고 영어공부를 하고 싶다면 너는 내가 보내주겠다고. 너는 나처럼 필리핀 이런데 말고, 캐나다로 보내줄거라고. 나는 필리핀 다음에 캐나다로 갔었는데, 보다 체계적이고 자유로운 학습 환경에 동생은 꼭 그런 환경에서 영어를 배우길 원했거든.
그래서 동생이 직업군인 전환이 힘들거 같다고 했을 때, 네 성격에 어느 일이든 못하겠냐, 누나 워홀 갈려고 신청했다, 돈 벌면 너도 와서 영어공부 시켜줄게 그때까지만 기다려달라, 했는데. 내가 믿음을 주지 못했나봐.
워홀 출국일이 멀어서 그랬나, 내가 돈 벌면 부를 거란 그 시간이 길었나. 너무 기약없는 약속같았나, 동생은 결국 전역신고도 하지 못 한채 떠났어. 나에게 제대일자도 말해주지않었는데, 나중이 들어보니 한 달도 채 안남았었더라고. 그 얼마나 지옥같은 시간이었을까. 그 마음이 너무 전해지더라고. 나도 매 순간 돌아가기 싫은데 갈 곳이 거기뿐인 그 비참함을 알았었거든. 그런데 내가, 알면서도 방치한거지.
나는 함께할 미래를 차곡차곡 그리면서도 동생에게 함께 그리잔 말을 못했고, 믿음을 주지 못했고 그 댓가를 지금 치루고있어. 부모는 알고싶어하지도 않았으니 그 죄가 가볍겠지만, 나는 알면서도, 한국에서도 충분히 같이 도망칠 수 있는 시간이 길었음에도 나 혼자만 놀고먹었으니 죄가 크겠지.
의외로 일상생활은 문제없이 돌아가. 그냥 문득문득 생각이 스치면 아, 할 새도 없이 눈물이 흐르곤 하는데 다행히 사무실에서도 마스크를 써서 잘 넘어갈 수 있었어. 우린 소리내서 울지 않거든. 그러다 워홀 만료일자가 얼마 안남았다는 걸 알았을 때 그냥 가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냥 가면, 아무도 없는 타지에 가면 조용하게 사라질 수 있을거 같단 생각이 그땐 나한테 큰 동기가 되더라고. 결혼 얘기가 나오는 친구의 결혼 예정일을 묻고, 티켓을 끊었지. 혹시 다음 만남이 없을 수 있으니 가장 예쁠 모습 담고 싶었거든.
마음을 한 번 그렇게 먹으니까, 모든 감정이 차분해졌어. 화나고 억울하고, 분하고, 죄스러웠던 마음의 온도가 가라앉았어. 끝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가는 기분이었거든. 그냥 그땐 그랬어.
회사를 그만두고, 출국 서류를 정리하면서 부모님께는 그냥 통보했어. 워홀 얘기는 동생과 나만 알고 있었거든. 사실 난 이전에도 어학연수나 교환학생을 다 아르바이트 해서 모은 돈으로 갔기 때문에 부모님께도 말하지 않았었는데 이젠 내가 유일한 자식이 되어버려서 얘기를 했어. 반대 아닌 반대를 하셨지만, 새어머니는 내가 잠시나마 한국을 떠난더니 좋아했고, 친부모님은 차마 크게 반대는 못하시는 것 같았어. 사실 알 바는 아니었는데, 내가 정말 이제 외동이구나를 느끼게 되더라고. 그게 너무 무서워져서 그날 난 계획에도 없던 부스터샷을 맞으러 갔고, 그 핑계로 울면서 잠이 들면서 또, 거창하게 죽으러 간다고 생각했으면서 또 살고는 싶어져서 그 순간에 집을 나왔고 또 와중에 한 게 백신이라니,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나는 그땐 또 계속 살고 싶었나봐.
겨우 1년짜리 비자인데 송별회가 많이도 화려했었어. 동생일은 아직 친구들은 모르거든. 회사 동료 중에서도 그냥 내가 그날 나침부터 전화를 받고 정신없이 나가서 나를 싫어하는 상사들이 가십거리 삼아 얘기하는 걸 들은 친했던 동료들, 직접 연차처리를 해주는 인사과 정도만 사정을 알아서 그랬는지, 안쓰러워 그랬는지 한 분씩 돌아가면서 챙겨주시더라고.
나는 이제 비밀이 많아졌어. 동생일도, 캐나다로 출국한 것도 친구들에게 말하지 않았고, 여긴 정말 나를 모르는 사람 뿐이지.
여긴 아직 눈이 많고, 사람이 많지 않은 캐나다 작은 소도시야. 얘기해도 모를 그런 곳이지. 나랑 동생은 겨울을 좋아하고, 집에서 조용히 시간을 잘 보내는 편이라 대도시를 기피했거든. 우린 우리 얘기를 하고 싶어하지는 않지만, 물어보거나 자연스럽게 얘기가 나오면 거짓말하거나 말을 안 할 생각을 못하고 곧이곧대로 얘기를 하는 편이라 늘 인간관계에 피로를 느꼈거든.
동생 사진과 유품을 가져왔어. 내 방 뷰가 좋더라고. 창가에 동생 사진을 밖을 향해 돌려두었어. 좋은 풍경을 보면 유독 생각나. 나는 여전히 여기 이방인처럼 직업도 찾지 못하고 있는데, 이젠 여기서 되도록이면 오래 있고 싶어졌어. 동생에게 이 좋은 하늘과 풍경, 분위기를 오래 느끼게 해주고 싶어지더라고. 그러면 한 번은 꿈에 나와주지 않을까? 이런 감상적인 생각이 들 정도로. 오면 말없이 지내던 그 시간들을 후회하며 동생의 모든 말들을 들어줄거야.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 동생을 구출해내지 못하고 외면만 하며 홀로 즐기던 나를 꼭 원망하러 와줬으면 좋겠어.
아무에게 말하지 못하고, 말 할 필요도 없는 이 곳에 오니까 나는 되려 살아갈 마음이 생겼어. 나는 떠나는 과정 속에 이런 일들을 겪었지만, 혹시라도 비슷한 일을 겪고 하나의 방법으로 해외를 고려하고 있다면, 취직과 돈은 부차적으로 안전하게 마련을 하되 망설이지 말라고 얘기하고 싶었어. 생각보다 많은 위로가 되더라고.
나도 언젠가 무미건조하게 친구들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고 얘기할 수 있을 때까지 여기서 열심히 살아남아볼게. 최단기적으로는 직장을 찾고, 비자를 연장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줄거야.
취지에 맞지 않는 글이라 댓글로 알려준다면, 고마운 마음으로 옮기거나 펑하도록 할게.
사진은 캐나다 도착 후 음성 결과를 받고 자가격리를 끝내고 아침을 먹으러 나온 아침 하늘의 모습이었어. 모두들 힘내!
안녕, 토리들 :)
난 얼마전에 워홀로 한국을 떠나 캐나다 시골로 왔어.
워킹홀리데이 최종 승인날짜만 나오면 되는 마지막 단계 직전에 코로나가 터져서 약 1년 2개월 동안 승인날짜만 기다리게 됐었어. 덕분에 19년도 12월에 신청했던 워홀을 21년 3월에 최종 승인받았고, 22년 2월 2차 메디컬이 만료되기 직전에 캐나다로 들어왔어.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워홀이 끝나고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재취업도 했을 그 시간동안에 나는 워홀을 포기해야할까 고민이 많아진 일들이 있었지.
사실 내가 워홀을 신청했던건 동생과 한국을 떠나기 위해서였거든.
부모님의 이혼과 재혼으로 겉으로만 멀쩡히 보였던 가정환경이 우리에게는 학대와도 같은 시간이었고, 우리의 모든 선택에는 늘 폭언과 돈돈돈, 돈의 압박이 있었어. 난 중학교때부터 한달 용돈으로 모든걸 해결했고, 동생은 엄청난 감시와도 같은 생활속에서 살았거든.
나는 고등학교부터 집과는 멀리 떨어져서 집엔 거의 잠만 자러 들어갔었고, 대학교는 친엄마의 외가와 가까운 지방대로 가서 4학년까지 기숙사 생활을 했어. 남동생은 그럴 때마다 나에게 가지말라고 했지만 나는 나만 생각하고 도망쳤어. 내가 고3때 동생은 중학생이었는데, 내가 처음부터 지방으로만 생각한다는걸 알았을 때 처음 그렇게 말하더라고. 우린 되게 말없는 사이였고, 그냥 말없이 서로 영화본다는 핑계로 가끔 내 방에서 나는 침대, 동생은 바닥에서 자기도 하다가, 그마저도 남녀끼리 한 방에서 뭐하냔 말에 가로막혀 왕래도 마음 편히 못했었는데 동생이 그렇게 말하니 마음이 너무 안 좋더라고. 결국 난 그래도 그 끔찍한 곳에 동생을 홀로 두고 먼저 도망쳤지만..
대학교 들어가서는 친엄마에게 단칸방이라도 좋으니 3명이서 같이 살자고 했지만 어느새 홀로 산 세월이 더 길어진 엄마는 거절했고(아마 금전적인 문제도 컸겠지), 나는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어학연수를 핑계로 방학때도 집에 잘 들어가지 않았어. 난 대학교를 가면서 그렇게 멋대로 집과의 연락을 줄였던것 같아. 시간이 지나서 나는 아주 작은 회사에 바로 취업을 하고 친엄마 오피스텔(원룸)에 같이 들어가 거실 생활을 했고, 동생도 지방으로 대학교를 들어갔어. 그제서야 나는 동생이랑 문화생활도 가끔이나마 같이하고, 생일 선물이랍시고 기숙사에 피자나 치킨 배달도 시켜줬지. 우린 여전히 말을 살갑게 하지 못했고, 카톡의 대부분은 누나 돈 빌려줘, 언제까지 갚을 건데? 이었는데 돈을 벌어서 이젠 더이상 부모에게 뭐 사고싶은데 돈을 더 달라고 어떻게 말해야하나 생각하지 않고도 비싼 물건이든 그렇지 않든 그 결정권이 온전히 나에게 있으니까 정말 돈을 미친듯이 쓰게되었어. 1원도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지 않을 정도였고, 거기엔 동생도 포함이었어. 그래서 나는 독립할 생각을 하지도 않고 동생은 그대로 대학교를 졸업해서 군대에 갔어. 아빠의 고집으로 ROTC 로 갔거든. 직업군인을 하길 바랐어, 부모에겐 우린 늘 한심하고 창피한 자식들이라 사회 나와서 뭐하냐는 태도였거든.
동생이 밥도 주고, 굳이 안 나와도 되고, 면회도 본인이 싫다하면 볼 수 없는 곳에 가서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왜냐면 나는 그런 생각으로 육군사관학교도 한 때 꿈꿨었거든. 그래서 동생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할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해외여행을 갈 때, 연수를 갔을 때, 교환학생을 갔었을 때 동생은 늘 부러워했고, 나는 그때마다 약속했지. 네가 제대하고 영어공부를 하고 싶다면 너는 내가 보내주겠다고. 너는 나처럼 필리핀 이런데 말고, 캐나다로 보내줄거라고. 나는 필리핀 다음에 캐나다로 갔었는데, 보다 체계적이고 자유로운 학습 환경에 동생은 꼭 그런 환경에서 영어를 배우길 원했거든.
그래서 동생이 직업군인 전환이 힘들거 같다고 했을 때, 네 성격에 어느 일이든 못하겠냐, 누나 워홀 갈려고 신청했다, 돈 벌면 너도 와서 영어공부 시켜줄게 그때까지만 기다려달라, 했는데. 내가 믿음을 주지 못했나봐.
워홀 출국일이 멀어서 그랬나, 내가 돈 벌면 부를 거란 그 시간이 길었나. 너무 기약없는 약속같았나, 동생은 결국 전역신고도 하지 못 한채 떠났어. 나에게 제대일자도 말해주지않었는데, 나중이 들어보니 한 달도 채 안남았었더라고. 그 얼마나 지옥같은 시간이었을까. 그 마음이 너무 전해지더라고. 나도 매 순간 돌아가기 싫은데 갈 곳이 거기뿐인 그 비참함을 알았었거든. 그런데 내가, 알면서도 방치한거지.
나는 함께할 미래를 차곡차곡 그리면서도 동생에게 함께 그리잔 말을 못했고, 믿음을 주지 못했고 그 댓가를 지금 치루고있어. 부모는 알고싶어하지도 않았으니 그 죄가 가볍겠지만, 나는 알면서도, 한국에서도 충분히 같이 도망칠 수 있는 시간이 길었음에도 나 혼자만 놀고먹었으니 죄가 크겠지.
의외로 일상생활은 문제없이 돌아가. 그냥 문득문득 생각이 스치면 아, 할 새도 없이 눈물이 흐르곤 하는데 다행히 사무실에서도 마스크를 써서 잘 넘어갈 수 있었어. 우린 소리내서 울지 않거든. 그러다 워홀 만료일자가 얼마 안남았다는 걸 알았을 때 그냥 가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냥 가면, 아무도 없는 타지에 가면 조용하게 사라질 수 있을거 같단 생각이 그땐 나한테 큰 동기가 되더라고. 결혼 얘기가 나오는 친구의 결혼 예정일을 묻고, 티켓을 끊었지. 혹시 다음 만남이 없을 수 있으니 가장 예쁠 모습 담고 싶었거든.
마음을 한 번 그렇게 먹으니까, 모든 감정이 차분해졌어. 화나고 억울하고, 분하고, 죄스러웠던 마음의 온도가 가라앉았어. 끝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가는 기분이었거든. 그냥 그땐 그랬어.
회사를 그만두고, 출국 서류를 정리하면서 부모님께는 그냥 통보했어. 워홀 얘기는 동생과 나만 알고 있었거든. 사실 난 이전에도 어학연수나 교환학생을 다 아르바이트 해서 모은 돈으로 갔기 때문에 부모님께도 말하지 않았었는데 이젠 내가 유일한 자식이 되어버려서 얘기를 했어. 반대 아닌 반대를 하셨지만, 새어머니는 내가 잠시나마 한국을 떠난더니 좋아했고, 친부모님은 차마 크게 반대는 못하시는 것 같았어. 사실 알 바는 아니었는데, 내가 정말 이제 외동이구나를 느끼게 되더라고. 그게 너무 무서워져서 그날 난 계획에도 없던 부스터샷을 맞으러 갔고, 그 핑계로 울면서 잠이 들면서 또, 거창하게 죽으러 간다고 생각했으면서 또 살고는 싶어져서 그 순간에 집을 나왔고 또 와중에 한 게 백신이라니,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나는 그땐 또 계속 살고 싶었나봐.
겨우 1년짜리 비자인데 송별회가 많이도 화려했었어. 동생일은 아직 친구들은 모르거든. 회사 동료 중에서도 그냥 내가 그날 나침부터 전화를 받고 정신없이 나가서 나를 싫어하는 상사들이 가십거리 삼아 얘기하는 걸 들은 친했던 동료들, 직접 연차처리를 해주는 인사과 정도만 사정을 알아서 그랬는지, 안쓰러워 그랬는지 한 분씩 돌아가면서 챙겨주시더라고.
나는 이제 비밀이 많아졌어. 동생일도, 캐나다로 출국한 것도 친구들에게 말하지 않았고, 여긴 정말 나를 모르는 사람 뿐이지.
여긴 아직 눈이 많고, 사람이 많지 않은 캐나다 작은 소도시야. 얘기해도 모를 그런 곳이지. 나랑 동생은 겨울을 좋아하고, 집에서 조용히 시간을 잘 보내는 편이라 대도시를 기피했거든. 우린 우리 얘기를 하고 싶어하지는 않지만, 물어보거나 자연스럽게 얘기가 나오면 거짓말하거나 말을 안 할 생각을 못하고 곧이곧대로 얘기를 하는 편이라 늘 인간관계에 피로를 느꼈거든.
동생 사진과 유품을 가져왔어. 내 방 뷰가 좋더라고. 창가에 동생 사진을 밖을 향해 돌려두었어. 좋은 풍경을 보면 유독 생각나. 나는 여전히 여기 이방인처럼 직업도 찾지 못하고 있는데, 이젠 여기서 되도록이면 오래 있고 싶어졌어. 동생에게 이 좋은 하늘과 풍경, 분위기를 오래 느끼게 해주고 싶어지더라고. 그러면 한 번은 꿈에 나와주지 않을까? 이런 감상적인 생각이 들 정도로. 오면 말없이 지내던 그 시간들을 후회하며 동생의 모든 말들을 들어줄거야.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 동생을 구출해내지 못하고 외면만 하며 홀로 즐기던 나를 꼭 원망하러 와줬으면 좋겠어.
아무에게 말하지 못하고, 말 할 필요도 없는 이 곳에 오니까 나는 되려 살아갈 마음이 생겼어. 나는 떠나는 과정 속에 이런 일들을 겪었지만, 혹시라도 비슷한 일을 겪고 하나의 방법으로 해외를 고려하고 있다면, 취직과 돈은 부차적으로 안전하게 마련을 하되 망설이지 말라고 얘기하고 싶었어. 생각보다 많은 위로가 되더라고.
나도 언젠가 무미건조하게 친구들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고 얘기할 수 있을 때까지 여기서 열심히 살아남아볼게. 최단기적으로는 직장을 찾고, 비자를 연장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줄거야.
취지에 맞지 않는 글이라 댓글로 알려준다면, 고마운 마음으로 옮기거나 펑하도록 할게.
사진은 캐나다 도착 후 음성 결과를 받고 자가격리를 끝내고 아침을 먹으러 나온 아침 하늘의 모습이었어. 모두들 힘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