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nally. He dropped anchor in his own sheltered spot. It's Her.
가을비가 봄비처럼 내렸다. 차창에 부딪혀 흘러내리는 빗줄기를 따라 가로등 불빛이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혜준은 젖은 도화지 위에서 속절없이 번지는 물감 자국같은 그 노란 불빛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차를 두고 출근한 건 예정된 회식 때문이었다. 과장의 입에서 나온 '우리 국금과 식구들'이란 표현에 웃으며 술잔을 들어올리던 혜준은 잠시 3년여 전의 자신을 떠올렸다. 불편한 사람들과의 불편한 식사가 싫던 시절이 언제였나 싶도록 멀게 느껴졌다. 단순히 혜준이 유연해진 것인가 하면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것은 유기적이고도 상대적이어서, 혜준이 요즈음 느끼는 편안함은 곧 그의 주변 사람들이 느끼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 변한 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관계지.
택시가 아니라 버스를 탄 건 집에 좀 더 천천히 들어가고 싶어서였다. 자리를 잡고 산 지도 이제 3년이 되어가는 작은 아파트가 요즘따라 부쩍 크게 느껴졌다. 홀로 집에 있을 때면 그 좁은 공간을 가득 메우는 적막이 혜준의 머리 속을 소란스럽게 했다.
원래 외로움을 타는 타입이 아니었는데. 왜일까. 실패와 가난에 매몰되어 10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딸의 손을 놓아버린 아버지, 죽은 새언니와 오빠의 딸을 데려다 돌봤지만 끝내 엄마는 될 수 없었던 고모,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처조카를 함께 키운 고모부, 많은 부분에서 서로를 이해했지만 그런 고모부에 대한 감상은 공유할 수 없었던 사촌 마리까지. 함께 있는 것 같던 순간에도 시시때때로 혼자인 것 같았던 순간들. 그 시간들 속에서조차 의연했었는데. 이제와서 왜. 혜준은 굳이 답을 찾으려 애쓰지는 않았다. 그냥 그런가보다, 할 뿐.
아파트 근처의 정류장에 내린 혜준이 우산을 펼쳐 들었다. 퇴근무렵부터 내린 비가 도로를 전부 적시다 못해 군데군데 물웅덩이를 만들어 두었다. 작은 연못같은 것들을 피해 걷는 혜준의 걸음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뒤늦게 취기가 올라왔다.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오랜만이라 그런가. 짧게 고개를 흔든 혜준이 두어번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새까만 아스팔트 위로 카펫처럼 깔린 빗물에 반사된 가로등 불빛이 눈가를 시큰하게 했다.
그러니까, 너무 오랜만에 마신 술이라서. 그러니까, 바닥에서 위로 비쳐든 노란 불빛이 너무 눈이 부셔서.
그래, 그래서. 횡단보도 앞에 선 혜준은 제가 또 착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길 건너 편의점 앞, 벤치에 앉아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을 때.
-유진 한 자수했어. 혜준이 너 알고 있었어?
이미 한국이 아니라는 그의 말에 안심이라는 대답을 건넨 다음날이었다. 아침 일찍 걸려온 마리의 전화에 주말의 늦잠 기운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왜? 라는 질문은 무의미했다. 혜준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기쁨과 안도, 그리고 걱정이 동시에 밀려 들었다. 고작 대여섯번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눈 사람에 대해 이런 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게 혜준 스스로도 신기했다.
-오늘 구치소 나갔다던데, 혹시 연락 없었어?
그의 소식은 이따금씩 마리를 통해서, 그리고 TV나 인터넷의 단신을 통해 혜준에게 흘러 들어왔다.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유진 한이라는 이름이 마침내 뉴스에서 사라지게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른바 바하마 게이트로 통칭되는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국내외 소송은 아직까지도 현재진행중이었다. 마리의 입에서, 기재부 직원들의 입에서, 혜준은 이따금씩 그의 이름을 접했다.
그때마다 혜준은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을까.
'난 이 사무관이랑 같이 식사하고 싶어요.'
'나한테로 와요.'
'당신한테 목숨 걸었던 사람인데, 병원으로 염탐이나 하러오고.'
'아니예요?'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인 것 같아요?'
몇 차례 되지 않는 만남들 속에서 유진이 혜준에게 던진 이야기들 속엔 거짓이 없었다. 처음부터 혜준과의 관계엔 그 어떤 허들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독히도 솔직하게 제 감정을 내리 쏟아놓던 남자였다. 그렇다면,
'꼭 찾아갈게요. 그때까지 잘 있어요.'
휴대폰 너머로 들리던 그 말도, 진심이었을텐데.
'그러니까 더 이상, 그 속에 숨어있지 말아요. 한유진씨.'
마지막 통화 끝에 자신이 건넸던 말, 그리고 대답 대신 들리던 그의 호흡을 혜준은 기억하고 있었다. 한번씩 유난히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고요한 방 안에서 혜준은 그 순간을 오래도록 되새김질했다.
그 기약 없는 기다림 속에서 가끔. 청사 앞에서, 근처 커피숍에서, 때론 그냥 길을 걷다가. 혜준은 이따금씩 그를 본 것 같은 착각에 휩싸였다. 그러나 다시 고개를 돌려보면 그저 닮은 사람이거나, 또는 신기루처럼 아무 인기척도 없는 빈 공간이기 일쑤였다.
그래서 혜준은 이번에도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언젠가 그가 혜준에게 자신이 어느 나라 사람인 것 같냐고 물었던 그 자리. 더 이상 어설픈 핑계로 도망치지 말라는 혜준의 말에 울 것 같은 얼굴로 혜준을 바라보던, 그 자리. 지금 그 자리에 앉아있는 저 남자가 한유진일리 없다고.
퇴근무렵부터 내린 비가 도로를 전부 적시다 못해 군데군데 물웅덩이를 만들어 두었다. 우산을 들고 앉아 있는 남자의 바로 주변만 젖지 않은 채 바싹 말라 있었다. 바닥 어디쯤에 던져져 있던 남자의 시선이 혜준을 향했다. 눈이 마주침과 동시에 혜준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윽고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색을 바꿨다. 마주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혜준이 걸음을 옮겼다. 가장 가까운 거리를 직선으로 내딛는 걸음이 작은 연못처럼 물이 고인 웅덩이를 피하지 못하고 디뎠다. 순식간에 발끝이 젖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앉아 있던 마른 자리에도 빗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순식간에 젖어가는 벤치가 미처 다 축축하게 색깔을 바꾸기 전에, 혜준이 그의 앞에 섰다. 몇걸음 되지 않는 거리였고, 달려온 것도 아니었는데 왜인지 숨이 찼다. 딱 우산 두개의 반지름을 합친 것 만큼의 거리를 두고 선 채, 빗줄기를 뚫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아 있었다.
"늦었네요."
먼저 입을 뗀 것은 유진이었다. 기억 속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목소리에 혜준은 그제야 눈 앞의 남자가 신기루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밀려오는 안도감에 조금 전까지 꽉 쥐고 있던 주먹에서 스르르 힘이 풀렸다.
"기다렸어요. 이혜준씨."
그리고 이어진 그의 말에 혜준의 입에서 작게 한숨같은 웃음이 터졌다. 혜준은 그제야 깨달았다. 혜준에겐 오랜 습관이나 다름없던 외로움이 왜 요즈음 갑자기 혜준을 힘들게 했는지.
기다렸다니. 누가 누구를. 기다린 건 당신이 아니라,
"나도,"
짧은 숨을 끊어 내쉰 혜준이 답했다.
"나도 기다렸어요. 한유진씨."
혜준의 대답에 이번엔 유진이 긴 숨을 토해냈다. 긴장이 풀린 듯 작게 웃는 남자의 얼굴을 보며 혜준이 마주 웃었다. 가을비가 봄비처럼 두 사람을 감쌌다.
*
'보석 신청이 받아들여진 건 굉장히 유의미한 일입니다. 앞으로 결과가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구치소에서 나오던 날, 변호사는 다소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유진을 위한 기쁨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커리어에 남을 또 하나의 그럴 듯한 승점에 신이 난 탓이었겠지만, 어찌되었든 유진에게도 나쁠 것이 없었으니 유진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 한 씨는 지금까지처럼 협조적으로, 성실하게 조사나 재판에 임하시면 됩니다.'
'성실'하게. 성실하게라. 자신과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 단어에 유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늘 쫓기듯 살아온 인생이었다. 브루클린의 한 구석, 허름한 세탁소에서 맨하탄의 빌딩숲 꼭대기에 오르기까지. 그의 삶은 늘 치열했고 한번도 게을렀던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성실한 삶'이라는 부르기에는 분명한 어폐가 있었다.
몸에 든 멍이 미처 사라지기도 전에 그 멍이 과녁이라도 되는 것처럼 주먹질이 쏟아지는 날들이 허다했다. 폭격같은 폭력은 엄마와 그를 가리지 않았으나, 그 얇은 팔이 유진을 감싸안고 버티는 날이면 오롯이 엄마의 몫이 되었다. 소리를 지르면 더 세게 때릴 것을 알기에 턱이 얼얼하도록 입을 악 다물고 신음을 삼키던 엄마의 윽윽 소리가 그의 귓가에 사이렌처럼 울렸다.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는 밤이면 엄마는 피아노를 쳤다. 베토벤의 비창 3악장. 몇 차례인가 술병에 깨어질 뻔 했으나 살아남은 건반들이 엄마의 손끝에서 춤을 췄다. 전부 말라붙어 더는 남아 있지 않은 엄마의 눈물 대신 흐르는 선율이 방 안을 메울 때마다 유진은 무릎을 끌어안고 울었다. 언젠가 이 고통에 질려버린 엄마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리지 않을까. 혹시나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엄마도 진작 자유를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선연한 두려움은 자기혐오로 이어졌다가, 종국에는 저주로 치달았다. 라스베이거스 어딘가에서 총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아버지를 상상하던 날에는 그런 자기 자신이 끔찍했다.
그런 유진의 바람을 누군가 들어주기라도 한 것처럼, 아버지는 어느날 갑자기 증발해버렸다. 친척들은 그런 아버지뿐만 아니라 엄마와 유진 또한 처음부터 없던 사람들인 것처럼 굴었다. 유진아. 엄마는 너 하나만 있으면 돼. 유진아. 유진아. 어린 시절 유진의 놀이터였던 브루클린의 세탁소에서 엄마의 꿈은 최종적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코끝을 알싸하게 만드는 약품 내음과 웅웅거리는 기계 소음 속에서 성악가를 꿈꾸었던 여자는 죽고 먹여살려야 하는 어린 아들을 둔 엄마만이 살아남았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유진이 무대를 동경하고 사랑했던 것은 어떻게 보면 예견된 운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의 반을 구성하고 있는 엄마의 유전자. 글자를 익히기도 전부터 들어온 아름다운 아리아와 가곡들. 피아노 선율.
그러나 엄마의 꿈을 잡아먹은 가난은 그의 꿈 역시 내버려두지 않았다. 고작 세탁비 16달러 때문에 시비가 붙은 손님에게 엄마가 맞는 것을 보았던 날, 유진은 무대를 버렸다.
잃어버린 꿈에 대한 상실감을 단초로 일어난 돈에 대한 강박은 금액이 커질수록 더 커다래진 관성으로 그를 밀고 당겼다. 그 과정에서 아프리카의 한 대통령이 자살했고, 아이들이 콜레라 예방 접종을 받지 못해 죽어갔으며, 해고된 멕시코 자동차 공장 사원이 죽어갔다. 그럼에도 유진은 멈추지 못 했다.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난 채 내리막길 위에 놓인 자동차처럼. 치매에 걸린 엄마의 시간이 거꾸로 돌아가, 언젠가 꼭 같이 한국으로 여행을 가자고 했던 약속을 잊어버렸어도. 10년이 넘게 지나버린 그의 스물두살 생일을 여섯번째 축하해도. 유진은 멈출 수가 없었다. 멈추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려서, 돌아갈 곳을 찾을 수도 없었다.
'애예요? 엄마 핑계 대게.'
그리고 그런 유진 앞에 혜준이 나타났다. 어머니의 나라에서 만난, 어머니를 닮은 여자.
'그러니까 더 이상, 어머니를 미안하게 만들지 말아요. 어머니 사랑하시잖아요.'
가난에 짓눌린 가족을 두고도 무너지지 않은 여자. 무슨일에도 부서지지 않을 것처럼 강해 보이지만 아마 누구도 보지 못할 곳에서 혼자 울었을, 베토벤의 비창 3악장이 슬프다던 여자. 이혜준.
'저한테, 어느 나라 사람같냐고 물어봤었죠.'
'한국사람이요.'
'지사장님 어머니가, 돌아오고 싶어하던 우리나라. 어딘가의 부속품이 아닌 그냥 사람. 얼마든지 따뜻해질 수 있는, 그런 사람.'
'그러니까 더 이상, 그 속에 숨어있지 말아요.'
'한유진씨.'
이름마저 잃어버리고 말 길의 문턱 바로 앞에서, 혜준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멈추어도 좋다고. 머물러도 괜찮다고. 여지껏 풍랑 속을 헤매이면서 한번도 보지 못 했던 불빛이었다. 그 빛에 기대어, 유진은 그제야 멈출 수 있었다.
형이 확정된 후 유진은 한동안 그 전보다 더 바빴다. 따로 고용한 비서를 통해 어머니를 모셔오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미국과 호주의 자산을 처분하고 바하마와의 배상 건을 정리하는 데에는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마침내 모든 일이 다 정리되었을 때. 해야하는 일은 모두 끝이 나고 이제 무얼 하고 싶은지를 고민하면 되는 그 순간에, 그의 머리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그녀의 이름 세글자였다. 이혜준. 그의 목적지.
머리를 올릴까. 정장 차림이 나을까. 전에 없는 고민으로 오후 시간을 꼬박 보낸 유진은 결국 검은 목폴라 위에 트렌치코트를 걸친 편안한 차림으로 혜준의 집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자연스럽게 내려둔 머리카락이 눈썹께에 흩어져 있었다.
야근 없이 바로 퇴근한다고 쳐도 6시. 도착하려면 7시는 되어야 할 텐데. 그가 혜준의 집 앞에 도착한 것은 5시 무렵이었다. 급해도 너무 급한 마중이었다. 한참을 기다려야 할 게 뻔한데도 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전에 없이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몇 차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뱉었다. 이런 기다림이라면, 얼마든지. 한시간쯤 지나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에 우산을 펼쳐 들면서도, 한유진은 그저 즐거웠다.
그리고 마침내 혜준이 그의 앞에 나타났을 때. 마주친 시선을 떼지 않고 그를 바라보며, 가로등 불빛을 등지고 물웅덩이를 지나 그에게 다가선 혜준을 마주했을 때. 유진은 직감했다. 목적지가 없던, 그래서 늘 지치고 힘들었던 긴 항해가, 비로소 끝이 났음을.
*
"피아노네요."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가장 먼저 보이는 하얀 피아노에 유진의 시선이 머물렀다. 그의 손에서 젖은 우산을 받아들어 현관 한 켠에 둔 혜준이 슬리퍼에 발을 끼워 넣으며 답했다.
"지금은 안 돼요. 시간이 늦어서."
"쳐달라고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 정도 상식은 있어요, 나도. 덧붙이는 말에 혜준이 피식 웃었다. 그렇겠네요.
"나중에, 밝을 때 쳐 줘요."
혜준이 내어준 슬리퍼를 신고 안으로 들어서며 유진이 말했다. 혜준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밤이라 커피는 좀 그렇고… 녹차, 마셔요?"
벗은 재킷을 식탁 의자에 걸쳐둔 혜준이 싱크대 선반을 열며 물었다. 뭐든지 좋아요. 유진이 답했다.
"어떻게 지냈어요?"
찻잔 두개를 내려놓고 자리에 앉자마자 제게 던져진 질문에 혜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내가 해야하는 질문 아니예요?"
"왜요?"
"그야…"
"내 얘긴 재미없어요. 재판. 변호사. 바하마. 이런 얘기들."
"하긴 그렇네요."
혜준의 대답에 유진이 웃었다.
"그렇죠?"
"그런데 나도 마찬가지예요. 내도록 일한 거 말고는. 뭐가 없는데."
"역시, 성실한 대한민국 관료."
"어째 놀리는 것 같네요."
"그럴리가."
유진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잠시 눈을 흘긴 혜준이 찻잔을 들어 뜨거운 김을 호오, 불었다. 그런 혜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유진이 말했다.
"그럼 다른 거, 물어봐도 되나."
혜준이 그런 그와 눈을 맞추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정말 기다렸어요, 나?"
그리고 뒤이은 유진의 질문에, 혜준은 얼이 빠진 얼굴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하는 걸까. 혜준의 얼굴에 비친 기색을 읽었는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방금 그 질문이 우스웠는지 짧게 고개를 흔든 유진이 얼른 덧붙였다.
"아니다. 방금 그건 못 들은 걸로,"
"기다렸어요."
그러나 혜준의 대답이 한발 빨랐다. 단호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에 찻잔으로 떨어졌던 유진의 시선이 다시 혜준을 향했다. 마주친 시선 끝에 미소짓는 얼굴이 있었다.
"오겠다고 했잖아요. 한유진씨가."
혜준이 덧붙였다. 붉은 입술에서 나오는 자신의 이름에 찻잔을 쥐고 있던 유진의 손가락 끝이 움찔, 움직였다. 그런 유진의 반응을 캐치한 혜준이 속으로 작게 웃었다. 따뜻한 방 안에 들어와 있어서일까. 다 사라진 줄 알았던 취기가 다시 올라오는 것 같았다. 묘하게 붕 뜬 것 같은 느낌에 혜준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그런 혜준을 빤히 바라보던 유진이 물었다.
"키스해도 되나요?"
"안 돼요."
"왜요?"
맙소사. 이 남자는 되묻는 게 습관인 걸까.
"오늘은요."
"그럼 내일은?"
"그건 내일 생각해볼게요."
흐음. 혜준의 말에 유진이 손목을 들여다보면 시간을 확인했다.
"내일이면, 대략… 두시간 반 후에?"
"뭐라구요?"
혜준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유진이 그런 혜준을 보며 웃었다. 둘 사이에서 터진 웃음이 조용한 혜준의 아파트를 메웠다. 지극히 평범한, 보통 연애의 시작이었다.
땜시 버틴다 ㅜㅜ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