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하고 있었다. 언젠가 분명 다시 이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이혜준씨.'라는 인사를 듣게 되는 순간이 올 거라는. 그 언젠가가 이렇게나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지만. 혜준은 말을 잊고 눈 앞에 선 남자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뺨이 약간 꺼지고 전체적으로 지쳐보이기는 했지만 눈빛 만큼은 여전히 기억 속의 모습 그대로 반짝이고 있었다.
"잘 지냈어요?"
"........"
"ㅎ...많이 놀랐어요? 내가 분명 꼭 찾아오겠다고 했을텐데?"
한국을 떴다던 사람의 불구속기소 소식을 TV를 통해 접하게 되었던 날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머리는 '마땅히 그렇게 되었어야 할 일'이라고 속삭였지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었지. 그가 한국인으로 살기 위해 정확히 무엇을 얼만큼 내려놓거나 잃었어야 했는지 혜준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지만, 매우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만 할 거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그 후로도 여러 루트를 통해 그의 소식을 들으며 많은 상념들이 머릿속과 가슴속을 헤집고 갔지만, 항상 마지막에는 그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과 그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만이 끈질기게 남아 몸집을 키웠다. 그런데 바로 지금, 정작 그 당사자가 자유인 신분이 되어 눈 앞에 서 있는 것을 보니 이다지도 비현실적일 수가. 혜준은 정신을 차려보려고 애썼다. 그 건이 오늘 오후 쯤에 마무리가 됐을텐데 이 사람이 지금 여기 있다는 건..
"와~ 너무하네. 아무리 그래도 차 한 잔은 권할 줄 알았는데. 나 여기서 다섯 시간.."
"따라와요."
"네?..!!!"
폭탄같은 말을 던지고 앞장서서 타박타박 아파트 현관 계단을 올라가는 혜준의 등을 보며 유진은 잠시 멈칫했다. 따라오라고? 저 위로?? 설마....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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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현관 한 켠에 우뚝 선 유진에게 혜준이 식탁 의자를 가리키며 단호하게 말했다.
"저기 앉아서 잠깐만 기다려요. 나 잠깐 나갔다 올테니까 아무데도 가지 말고."
"?? 어디요? 나도 같이 가요. 어디 나가서 같이 저녁이나.."
"기다려요, 여기서. 알겠죠?"
예상 밖의 상황이 당황스러운지 '함께 나가자'며 몸을 트는 유진에게 다짐하듯 그렇게 말을 마치고, 혜준은 홀로 휭하니 현관문 너머로 사라졌다. 타다다닥- 뛰어가는 발걸음 소리가 점차 멀어져가는 동안에도 유진은 여전히 벙-한 기분으로 현관에 서 있었다. 혜준의 집 안- 그녀의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으로 들어와 있다는 현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안도와 함께 기쁨이 몰려왔다. 자유로운 신분이 되자마자 보고 싶어서 무작정 찾아오긴 했지만, 사실 혜준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두려웠던 것이다. 아파트 앞 화단에 걸터앉아 연락을 해볼까 말까 다섯 시간 내내 고민했던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썩 반가워 하는 반응이 아니더라도 실망하지 말자고, 가볍게 인사나 건네고 돌아서야지 생각했었는데.
고개를 돌려 닫힌 현관문을 바라보고 심호흡을 한 유진은 조심스레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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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에 그걸 파는 데가...있을까?'
혜준은 핸드폰 액정에 뜬 시간을 확인하며 아파트 입구 근처의 상가쪽으로 달렸다. 숨이 찼지만 집 안에서 혼자 멀뚱히 기다리고 있을 남자를 생각하면 서둘러야 했다. 편의점에 있을 거 같지는 않고, 이 동네에 식료품 가게가 있나? 평소에 고모가 보내준 반찬에 밥만 겨우 해서 끼니를 때우느라 이 동네에서 장을 본 기억이 별로 없는 혜준으로서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이왕 크나큰 결심을 하고 집 안에까지 들인 이상, 이것만큼은 꼭 자기 손으로 챙겨주고 싶었다. 잠시 멈춰서서 고개를 갸웃하던 혜준은 큰 길 바로 앞에 위치한 제법 규모가 큰 마트를 떠올리고 그 쪽으로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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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
"ㅍ...하하하하하하하하."
"......."
"이거, 그거죠? 나 영화에서 봤어요."
눈가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활짝 웃으며 자신의 앞에 놓인 대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던 유진이 말을 이었다.
"Be white, live white, like this."
"알면 얼른 먹어요. 남기지 말고 전부 다."
혜준은 유진에게 숟가락을 건네며 말했다. 부침용 두부는 다 팔리고 없어서 찌개용 두부를 샀더니 흐물거려서 젓가락으로는 먹기 힘들것 같았다. 소금물에 데치기는 했는데...간장이라도 줘야하나?
"근데..나는 감옥갔다가 나온 거 아닌데? 그래도 이거 먹어요?"
뜨끈한 김이 나는 데친 두부를 한 숟가락 떠서 후후 불며 식히고 있던 유진이 눈웃음치며 혜준에게 한 마디를 던졌다. 아니, 이 양반이. 기껏 챙겨줬더니만- 여유를 되찾고 한껏 능글맞게 좋아하는 기색이 느껴져 약간 울컥하는 기분이 된 혜준이 받아쳤다.
"감옥 가야 할 만큼 큰 껀 했으니까 잔말말고 먹어요. 그리고, 다시는 그러면 안돼요."
"......알아요. 약속할게요. 그리고 고마워요."
"........"
"...영화에서 봤는데...흠...이런거 가족이나 친구나..아무튼 친한 사람들이 챙겨주더라고요."
"..........."
"나는 그럼...이혜준씨한테 그 정도는 되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생각해도 되는 거죠?"
".....네."
혜준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춘 유진의 얼굴에는 웃음기라곤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남자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맞받으며 혜준은 생각했다. 이제까지 살면서 내렸던 수많은 결정 중에, 오늘만큼 충동적으로 내린 결정은 없었지만. 후회하지 않아.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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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헉- ㅠㅠ
아니 연애는 둘이 해야 하는데 왜 내가 기가 빨리나...
이 뒤는......몰라, 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