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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 청나라 역사 배경 정보들 http://www.dmitory.com/drama/4901041
구룡탈적+견환전 등장 황자들 외가 정리 http://www.dmitory.com/drama/4856320
이미 아는 톨들이 많겠지만 견환전 원작은 가상 역사 배경이야
후궁들 중 견환, 황후, 화비, 제비, 녕빈 5명만 역사에 맞췄고 나머지 후궁들은 원작 캐릭터들
저 5명도 원작+정사+야사를 섞어서 만들었기 때문에 정사와는 많이 다르고
그래서 이 글이랑 견환전이 완벽히 일치하지는 않고 그냥 역피셜은 이랬다...정도로만 봐줘
옹정제는 기록이 남아있는 후궁이 총 31명이야
적은 숫자는 아니지. 청나라에서는 네 번째로 후궁이 많은 황제니까
하지만 고위 품계의 후궁이 아주 적어
이 고위 후궁들 중에서도 친정이 대단한 후궁은 거의 없고
그래서 이 글에서는 고위 후궁들만 전부 써볼게
황후 포함 8명밖에 안되기 때문에 뺄 이유도 없고
일단 이전 글에서 이것만 옮겨오고 시작할게
신분제
청나라의 신분은 크게 기인(특권계층), 민인(평민), 천민으로 나뉘어
기인은 다시 4개로 나뉘는데
1) 상삼기인: 상삼기(양황기, 정황기, 정백기)에 속하는 기인으로 최고 계층이자 고위 관직을 독점하는 세력
2) 하오기인: 하오기(정홍기, 양백기, 양홍기, 정람기, 양람기)에 속하는 기인으로 주로 중하급 관료들
3) 내무부포의: 상삼기의 포의로 황실 직속 부서에서 일하는 계층, 대부분 궁녀가 이 계층
4) 하오기포의: 하오기의 포의로 왕부 직속 부서에서 일하는 계층
1. 효경헌황후 오랍나랍씨(1681~1731)
품계: 적복진→황후
기적: 정황기 포의(내무부포의)→정황기 만주(상삼기인)
부친: 초품 일등공 겸 정1품 내대신 비양고
모친(혹은 적모): 다라격격
견환전에서는 순원의 인생에 황후로서 의수의 공적이 합쳐져서 효경헌황후가 되었다는 설정이었지
그래서 따지자면 효경헌황후는 순원에 더 가까운 인물이지만 순원은 등장하지 않는 관계로 의수 사진만..
포의 출신하면 화비만 떠올리지만 사실은 황후도 마찬가지야. 황후 가문도 포의 출신이었어
하지만 질적으로 연씨 가문과는 완전히 달랐지
오랍나랍씨는 해서여진 부족장 가문 중 하나였는데 1613년에 누르하치에게 정복당했어
(해서여진이 뭐냐?? 하는 톨들은 이전글 '잡다한 청나라 역사 배경 정보들' 건국사-나랍씨 부분 읽어줘...다 쓰려니 스압이ㅠ)
당시의 부족장이 오랍나랍 포점태인데 효경헌황후는 포점태의 12촌 손녀뻘이야
그러니까 황후 가문은 오랍부 부족장의 먼 방계 가문인거지
건국 초기에는 피정복민이었고 부족장의 직계가 아닌 방계 가문이었기 때문에 포의였지만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이 하나의 만주족으로 융합된 뒤에는 만주족의 정통 귀족 가문으로 대우 잘 받았거든
그래서 포의 출신이라고는 해도 다른 포의 출신이랑은 질적으로 다르긴 해
황후 가문은 할아버지인 박호찰 대에 투항했어
박호찰은 4품 좌령으로 평범한 관리였는데
황후의 아버지인 비양고가 정1품 내대신까지 올라가면서 집안을 일으켜 세웠어
(내대신은 종1품 작위인데 비양고는 정1품 대우를 받은거야. 관직 자체는 종1품이 맞아)
여담으로 효경헌황후는 적녀인지 서녀인지 의견이 분분한 인물이야
황후는 비양고가 환갑이 넘은 나이에 낳은 늦둥이인데 비양고의 정실로 기록되어있는 부인이 다라격격 한 명 뿐이라서
남자는 환갑이 넘어서도 자녀를 낳을 수 있지만 여자는 아니잖아
그래서 썰이 두 가지가 있는데
1. 효경헌황후는 비양고와 젊은 첩이 낳은 서녀이다
2. 효경헌황후는 비양고와 다라격격의 적녀이다
단, 다라격격은 비양고보다 젊은 두 번째 정실부인인데 황족인 다라격격의 지위가 높아 첫 번째 정실부인의 기록이 없는 것이다
(찐톨이는 개인적으로 2번 지지)
견환전의 효경헌황후가 적녀 순원과 서녀 의수의 인생이 합쳐진 인물이라는걸 생각하면 나름 괜찮은 우연의 일치같더라
적녀라는 설과 서녀라는 설이 공존하는 황후
2. 희귀비 뉴호록씨(1692~1777)
품계: 격격→희비→희귀비→황태후
기적: 양백기 만주(하오기인)→양황기 만주(상삼기인)
부친: 초품 일등공 겸 종4품 전의 능주
옹정제의 후비들 중 책봉문에 명문가 출신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후비가 딱 둘이야
황후 오랍나랍씨와 희비 뉴호록씨
뉴호록씨는 여진의 전통 명문가에서 출발해서 청나라 건국 이후 최고 명문 가문이 됐어
정확하게는 개국오대신 액역도의 직계 후손 가문..일명 홍의공가라고 부르는 그 가문이 최고 명문 가문이지 (이전글의 온희귀비 가문)
희귀비는 홍의공가 출신은 아니고 액역도의 사촌인 액역등의 증손녀야
효소인황후, 온희귀비 자매에게는 9촌 조카뻘이고
문제는 증조부 액역등은 관리가 되지 못했어
할아버지 오록도 관리가 되지 못했어
아버지 능주가 겨우 관리가 됐지만 중급관리였어
청이 건국한 이래 계속 놀다가 아버지 대에 겨우 중급관리가 됐으니 잘 살았을리가 없는 집안이지
한마디로 명문가의 방계는 맞는데 조상들의 능력 부족으로 권력이 쥐뿔도 없는 가문
대신 황제의 후궁이 된 뒤에는 권력 없는 명문가라도 명문가 출신이라는게 스펙이 되긴했어
견환전에서 천대받던 홍력은 실제로는 옹정 즉위와 동시에 암묵적인 황태자 대우를 받는데
이것도 유일한 만주 명문가 외가를 둔 황자라는 이유가 컸고
당시 연귀비의 황자 복혜가 살아있었고 연귀비는 또 다른 황자를 임신 중이었는데 거론조차 안되었거든
희귀비 본인도 효경헌황후 사망 이후에 실질적인 황후 역할을 했으니까 견환전 후반의 희귀비 위상과 크게 다르지 않고
단 총애받았다는것만 빼고
방계 가문이기 때문에 소속 기적도 효소인황후, 온희귀비 가문과는 달랐는데
희귀비는 원래 하오기 중 하나인 양백기 출신이었어
건륭제가 즉위하고 황태후가 되면서 만주 양황기로 올라갔고 홍의공가와 일가가 됐어
견환전은 희비 회궁부터 양황기 출신으로 올렸으니까
후반부 뉴호록 견환은 역사 속 희귀비의 후궁 시절보단 황태후 시절에 준하는 가문이었다고 보는게 맞을듯
만주 양황기의 뉴호록씨는 진짜 명문가ㅇㅇ
여담으로 중국에서 가장 복이 많은 여인으로 꼽히는 인물이기도 해
건륭제가 어머니한테는 세상 둘도 없는 효자였거든
청에서 가장 장수한 황태후인데 전성기에 태어나 최전성기의 황태후로 살다가 기울어지기 전에 죽은 인물
3. 돈숙황귀비 연씨(?~1725)
품계: 측복진→연귀비→황귀비
기적: 포의→양백기 한군(하오기인)→양황기 한군(상삼기인)
부친: 초품 일등공 겸 정1품 태부 연하령
형제: 초품 일등공 겸 정1품 태부 연갱요
먼저 화비냥냥에게 찰떡이었던 봉호 '화'는 원작에서 만든 봉호야
실제 연귀비는 봉호가 없었어
연귀비 가문은 희귀비와 정반대의 포지션에 있었던 가문이야
옹정 초기 권력은 최고였으나 뼈대 없는 포로 출신
한족이라고 해도 명문가가 있었거든
이전글에서 말한 한군 팔대가문이 대표적이고 그 외에도 한군기 명문 33가문이 있었어
연씨는 그 안에 속하지 못하고 오로지 한자를 안다는 이유로 청에서 살려뒀던 포로 출신 가문이야
연씨 가문은 연귀비의 증조부인 연유승과 조부 연중륭이 청의 포로로 잡히면서 편입 돼
명나라의 정3품 지휘사까지 했던 관리 출신이라서 포의로 편입되긴했는데
한족 포로 출신이라서 진짜 취급이 노비 수준인 포의
하지만 할아버지 연중륭이 과거에 합격하면서 양백기 본기 기인이 됨
청나라 초기에는 한문 아는 사람이 워낙 적어서 과거에 합격하면 신분 상승 시켜줬거든
~연씨 가문의 1차 신분 상승~
그리고 아버지 연하령이 자수성가해서 종2품 순무의 자리까지 올라가
그 덕에 딸이 황자 측복진까지 될 수 있었고
~연씨 가문의 2차 신분 상승~
마지막으로 옹정제의 오른팔인 오빠 연갱요
옹정 초기 연갱요의 위세는 대단했어
일단 하오기인 양백기에서 상삼기인 양황기로 또한번 신분 상승했고
황후와 희귀비의 아버지가 초품 일등공 작위를 받았잖아? 이건 황후와 황태후의 아버지 자격으로 받은거거든
그런데 연귀비의 아버지는 연갱요의 아버지 자격으로 초품 일등공에 정1품 태부까지 받아
물론 연갱요도 똑같이 받았고
~연씨 가문의 3차 신분 상승~
이렇게 연중륭-연하령-연갱요 3대에 걸쳐 한 단계씩 신분 상승을 한 가문이야
그리고 연갱요의 권력이 절정이던 옹정 즉위년부터 1725년까지 3년간은 대단한 권세였지
뒤에서는 출신으로 무시를 하든 말든 앞에서는 절대 무시 못 할 만큼
하지만 딱 3년 화려하게 불태우고 사라진 가문
1725년 연갱요는 92개의 죄를 물어서 사사당했고
조카들은 유배갔고 연귀비의 언니와 형부는 자결하면서 끝났어
이상 써볼만한게 있는 후궁은 끝!
나머지는 그냥 포의 출신 하급 관리 가문이야
옹정의 후비 중 명문가에 속하는 3인방도 시어머니인 강희제 후궁들에 비하면 소박하고
강희제는 개국공신급 명문가 직계 출신 황후/후궁만해도 9명이니 뭐....
그리고 희귀비랑 연귀비는 진짜 극과극 정반대의 포지션이야
권력은 쥐뿔도 없는 최고 명문가 방계 희귀비 vs 명망은 쥐뿔도 없는 최고 권력가 연귀비
밸런스 따졌을 때 명문가 방계에 권력도 있었던 황후 집안이 제일 위인건 확실하고
희귀비와 연귀비는 각자의 기준에 따라 판단해
기준이 권력이라면 연귀비 가문이 압승
4. 녕비 무씨(?~1734)
품계: 격격→녕빈→(추봉)녕비
품계: 격격(?)→녕빈→녕비
기적: 양황기 한군 (상삼기인)
부친: 종5품 지주 무주국
녕비는 봉호 빼고는 드라마랑 공통점이 없어
왕부 시절 격격으로 시집왔고 옹정이 즉위하면서 녕빈이 됐는데 건륭이 즉위하면서 녕비로 추봉한 후궁
수정) 청사고에는 녕빈이 사망한 후 녕비로 추봉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사망하기 한 달 전인 1734년 4월에 녕비로 기록된 문서가 있어서 생전에 녕비로 진봉됐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아
정식 책봉 기록이 없는 걸로 봐선 생전에 정식 책비례를 올리지는 못했고 사망한 뒤 추봉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을 듯
그리고 녕비가 왕부의 격격 출신이라고 알려져 있기는 한데..이부분 좀 애매한 것 같아
격격 출신이라고 보는 이유는 수녀 선발로 후궁이 됐다면 홍력, 홍주의 복진들과 함께 기록이 있어야하는데 녕비의 기록만 없고
청사고에는 겸비가 왕부의 격격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건 확실한 오류거든
겸비는 옹정이 즉위했을 때 고작 9살이었으니까 1729년 입궁했다는 기록 쪽이 타당해
그래서 녕비를 겸비로 잘못 적었을 것이라는 게 정설이었는데 내무부 문서상 상충되는 부분이 많더라고
옹정 원년에 녕빈으로 책봉이 됐다는데 그 이후에 다른 후궁들은 기록이 있어도 녕빈의 기록은 거의 없어
아직은 확실하게 어느 시기에 결혼했다고 말하기 힘들고 혹시 수정할만한 거 발견하면 다시 올게
포의 중에서도 명문가가 있었듯이 상삼기인 중에서도 한미한 집안이 있었는데 녕빈 가문이 딱 그 사례야
기적은 한군기라고 해도 팔기의 우두머리인 양황기 출신이라서 아주 좋은 편인데
지방의 한미한 한군기 관료라서 명문가랑은 거리가 멀어
아버지 무주국도 녕빈이 시집올 때는 정7품 지현이었다가 딸이 황실로 시집간 뒤에서야 종5품 지주로 승진했고
견환전에서 비교 하자면 안릉용의 현실 버전인데 릉용보다는 조금 더 나은 정도?
릉용의 아버지가 지방의 정8품 현승이었다가 릉용이 총애 받은 뒤 종5품 지주로 승진했었지
5. 제비 이씨(1676~1737)
품계: 격격→측복진→제비
기적: 양백기 포의(하오기포의)→한군기
부친: 종4품 지부 이문엽
청나라 황자들은 12살 정도가 되면 시첩부터 뽑았거든. 복진과 혼인하기 전 성교육 목적으로(...)
옹정이 정식 혼례를 치르기전에 맞이한 시첩이 제비와 밑에서 얘기할 무빈이야
첫 부인인 셈이고 동시에 옹정이 청년기에 가장 총애한 후궁이기도 해
연귀비가 시집오기 전 약 20년 동안은 제비만 4명의 자녀를 낳았거든
대신 연귀비가 시집오면서 총애는 밀렸고 홍시 문제까지 겹쳐서 냉대 받았던건 사실
견환전에서 다뤘던 시기에는 냉대받은게 맞긴함ㅠㅠ
제비도 측복진 출신은 맞는데 연귀비와는 격이 다른 측복진이야
1690년경 시첩으로 시집을 왔고 1706년까지도 시첩 이씨라는 기록이 남아있어서 최소한 1706년까지는 시첩이었어
1709년을 전후해서 측복진으로 진급했을거라고 추정하고
연귀비가 가문 덕에 측복진으로 시집을 왔다면 제비는 자녀 넷을 낳고 20년만에 측복진으로 진급한거지
집안은 좋은 편이 아니었어
하오기인 양백기의 포의 출신이었고 아버지 관직이 종4품이긴 했지만 저것도 말년의 이야기
1706년 기록에는 시첩 이씨의 부친 이문엽은 관직이 없었거든
대신 옹정이 즉위하면서 장자 홍시의 체면 때문인지 첫사랑 제비에 대한 정이 남은건지 신분을 상승시켜줘
포의에서 벗어나 한군기의 좌익기(양황기,정백기,양백기,정람기) 중 하나로 올리라고 함
양백기 포의 출신이었으니 변수가 없었다면 아마 양백기로 올라갔을거라고 추정되고
6. 겸빈 유씨(1714~1767)
품계: 유답응→유상재→유귀인→겸빈→겸태비
기적: 내무부 신자고포의(내무부포의)
부친: 정6품 관령 유만
견환전에서는 홍염이 희귀비의 아들로 나왔는데 실제로는 겸빈의 아들이야
그리고 옹정의 총애를 받았던 후궁이 청년기에는 제비, 중년기에는 연귀비였다면 말년은 겸빈이야
이런 이유로 견환을 희귀비+겸빈으로 보기도 해
겸빈은 1729년 궁녀를 뽑는 수녀 간택에 참여했다가 옹정의 눈에 들어서 한번에 답응이 돼
궁녀 선발에서도 바로 후궁이 되는 소수의 케이스가 있었는데 그런 케이스지
답응이 되고 몇 달뒤인 1730년 1월에 상재가 되고, 또 두 달 뒤인 3월에 귀인이 되는 초고속 승진을 함
3년 뒤에는 겸빈이 됐다가 건륭제가 즉위하면서 태비가 되어서 최종 품계는 겸비
옹정 후궁들중에 이런 케이스는 겸빈 하나밖에 없어
왕부 시절부터 20~40년 모셔왔던 경력 있는 후궁들 빼고
황제 시절 후궁이 된 젊은 후궁 중에는 고위 후궁이 된 것도 자녀를 낳은 것도 겸빈 한 명 뿐
7. 유비 경씨(1689~1784)
품계: 격격→유빈→유비→유귀태비→유황귀태비
기적: 양백기 포의(하오기 신자고포의)→양황기 포의(내무부포의)
부친: 정6품 관령 경덕금
황제의 총애? 됐고 미래의 황태후가 될 자매나 챙기는게 답이라는걸 보여주신 분
유비는 효성헌황후(견환)와 자매같은 사이라는 이유로 황귀비까지 됐기 때문에 경비나 단비의 모델로 보는 인물이야
최종 품계가 황귀비라서 단비라고 보는 팬들도 있지만
나이로보나 출신으로보나 후궁 시절 품계로보나 나톨 생각에는 경비에 더 가까운듯
유비는 제비랑 비슷해
둘 다 하오기포의 출신의 격격이었고 황자의 생모
유비는 홍력과 동갑인 5황자 홍주의 생모였거든
하지만 비슷한 출신에 같은 황자의 생모인 것치고 대우는 제비에 비해 못 받았어
제비가 측복진이 될 때 유비는 격격이었고
제비가 비가 될 때 유비는 빈이었고
제비가 한군기로 신분 상승할 때 유비는 하오기포의에서 내무부포의로 신분 상승했어
양백기 포의에서 양황기 포의로 올라간것도 신분 상승이지만 시집온 지 20년 된 황자 생모에게 주는 대우치고는 섭섭했지
대신 황태후와 친한 덕에 태비가 된 뒤부터 진짜 꽃길 인생 걸으신 분
건륭제가 즉위하자마자 귀태비로 올라갔고 궁에서 황태후와 함께 효도 받으면서 평생 잘 살았어
황태후가 죽은 뒤에는 황귀태비까지 올라가서 최종 시호는 순의황귀비
나이 계산해보면 알겠지만 무려 96세까지 장수하다 가신 분
8. 무빈 송씨(1677~1730)
품계: 격격→무빈
기적: 양백기 포의(하오기포의, 추정)
부친: 정6품 주사 송금주
딸을 낳았는데 요절했다는 이유로 흔빈의 모델로 보기도 해
일부 팬들은 조귀인이라고 보기도 하고...마찬가지로 딸을 낳았다는 이유때문에
투샷이 있었으면 그걸 썼을텐데 흔빈과 조귀인은 투샷이 없더라
무빈은 제비와 함께 옹정이 제일 처음 맞이한 시첩이야
제비보다 조금 빨랐을거라는 추정도 있기때문에 시집 온 순서로는 가장 빠른 후궁
왕부 시절에 딸 둘을 낳았는데 둘 다 요절했어
그 뒤론 평범한 격격 생활하다가 옹정이 즉위하면서 무빈이 됐고
하지만 제비, 유빈과 달리 하오기포의라는 신분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어
비로 승진하지도 못했고
빈이상의 후궁은 이 8명이 끝
스압 좀 줄여보겠다고 너무 많이 생략해서 글이 제대로 읽힐지 모르겠다
그래도 스압이지만ㅠㅠ
안 읽히는 부분 댓글로 말해주면 아는 선에선 최대한 보충해볼게!!
잘읽었어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