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가 달라졌다. 무표정한 하얀 벽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걸린 그림이 차갑고 어려웠는데, 전시장에 그림 밖으로 말이 움트는 듯한 모종의 분위기가 생겼다. 그림 하나를 보러 들어가기 위해 좁은 통로를 통과해야 할 때도 있고, 그림의 색감을 좀 더 흠뻑 느낄 수 있도록 다양한 색의 벽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현대미술이라는 어려운 주제를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 미술관은 빗장을 과감히 풀었다. 그리고 이 뒤에서 적극적으로 미술관의 ‘문제적이면서 흥미로운 장면’을 만들고 있는 사람이 있다. 바로 국립현대미술관 제1호 전시 공간 디자이너 김용주다. 개관 50주년을 기념하고 한국 미술 100년을 돌아보는 전시 키워드로 '광장'을 선택한 국립현대미술관. <광장: 미술과 사회 1900-2019>는 개관 최초로 서울관, 과천관, 덕수궁관 등 3개관에서 통합 전시로 열리고 있다. 과천관 현장에서 공간 곳곳을 누비는 김용주 디자이너를 만났다.
국립현대미술관 50주년 개관 기념전인 <광장: 미술과 사회 1900-2019> 2부(이하 광장)를 과천관에 최근 오픈했어요. 50주년 기념 전시에 대한 감회가 남다를 것 같아요.
<광장>이라는 전시를 준비하면서 미술관이 걸어온 50년을 시대 속에서 어떻게 다시 보여줄지에 대해 고민이 많았어요. 1900년부터 근미래까지 전시가 다루는 시기도 넓고, 과천관만 2000평이 넘는 공간을 차지할 만큼 대규모 전시이기도 했습니다. 전시실이 크다 보면 어느 부분은 빽빽하고 어느 부분은 헐렁해지면서 밀도가 들쭉날쭉해져요. 공간 안에서 쉼표는 당연히 있어야 하지만, 어느 시기도 허투루 다룰 수 없었어요. 시대를 바라보는 시선을 균등하게 가져가야겠다는 심리적 부담감을 가지고, 전시 흐름 속에서 시기별로 꾸준한 밀도를 어떻게 줄 수 있을지 고민했어요. 전시실에서 만나는 다양한 장면이 그 시대의 감성을 환기하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이를 재료에서 느껴지는 감성으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재건과 산업화 중심이던 개발 시대에는 회색 시멘트 보드와 우드 합판을 사용하고, 개인이 소비의 주체가 되고 '탈', '뉴', '포스트' 등의 접두어를 통해 상징되는 시대의 전시 영역에는 반짝이는 반사 재질과 일회용 소비를 대표하는 플라스틱을 활용해 확연하게 차이를 주었습니다. 조명 역시 어둡게 시작해 점점 밝아지고, IMF 시기를 맞아 다시 어두워지는 등 시대 상황에 따라 변화를 주었어요. 전시 공간 안에서 끊임없이 광장과 밀실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는 점도 눈여겨봐 주었으면 해요.
이번 <광장> 전시는 무엇보다 손글씨 느낌의 서체가 눈에 띄어요.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사람들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오면서 전례 없는 응원 문화가 생겼어요. 인터넷을 통해 만난 사람들이 광장에서 함께 응원하자는 이야기가 불씨처럼 번진 거죠. 엄청난 인파의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모였다는 걸 시각화해 보여주기 위해 당시 언론에는 부감 쇼트(high angle shot)가 등장했어요. 광장은 공동체의 의미를 끊임없이 재정의하는 거울과 같은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술 또한 마찬가지고요. <광장> 전시는 어쩌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공동체 이슈이기도 해요. <광장> 전시의 주요 시각 이미지는 '서명'에서 볼 수 있는 '손글씨체'에서 모티브를 가져왔습니다. 본인 고유의 필체로 무언가를 쓴다는 것은 동의한다는 뜻이에요. 내가 의사를 가지고 참여한다는 의미입니다. 다수에 휩쓸린 대중이 아니라 내 의사를 가진 사람들이 모인 광장이라는 의미에서 서명과 같은 손글씨체 형식의 시각 정체성을 만들어가고자 했어요.
현대미술, 건축, 디자인 등 다양한 장르를 한 공간 안에서 보여줘야 하는 전시였어요. 이를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게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사실 톤 앤 매너가 다른 장르를 같은 선상에서 보여주는 게 쉽지 않았어요. 건축과 디자인 장르는 중층 발코니라는 장치를 활용해 전시실에서 살짝 올라와 있는 공간에 배치했습니다. 발코니는 외부로 돌출해 바깥을 조망할 수 있는 역할을 해요. 시선에 단차를 주니 자연스레 관계가 형성됐어요. 1960년대 여의도 개발을 여러 층위로 중첩시킨 '미래의 부검', 김한용 작가의 1960~80년대 광고 사진, 다양한 매체의 등장 등을 소개하고 있어요. 매스미디어가 가정으로 진입하면서 중산층이라는 꿈이 생겼고, 이런 이슈를 상하부가 나뉜 구조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개인 이야기를 해볼게요. 첫 사회생활은 설계 사무소였다고 들었습니다.
종교 건축 중심인 설계 사무소였어요. 영적 공간과 전이 공간이 당시 연구 테마였는데 이게 묘하게 지금까지 연결돼 있어요. 성격이 다른 장소로 진입할 때 발생하는 고민, 시대를 접속시키는 방법, 작가라는 개인의 삶에서 어떻게 공감을 끌어낼 것인지에 대한 연구 등 전시디자인 업무에서 발생하는 고민의 맥락과 비슷합니다. 설계 사무소에서 일하다 보니 콘셉트를 언어로 풀어내는 것의 중요성도 일찍이 그때부터 깨달은 것 같아요.
원래는 전시가 아니라 자동차에 관심이 많았다고요.
아버지가 자동차 경주도 하실 만큼 열정적인 자동차 엔진 공학자셨어요. 자연스레 국내외 자동차에 대한 정보를 일찍 접했죠. 자동차에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어요. 무엇보다 옷 이외에 인간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움직이는 공간이 바로 자동차에요. 자동차 형태보다 공간에 대한 관심으로 자동차 쇼룸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어요. 자동차 퍼포먼스가 공간의 표면과 연동하는 방식을 고민했는데, 어느 날 선배가 '용주는 박물관의 전시 디자이너도 잘 맞겠다'고 넌지시 이야기해주었어요. 전시 디자이너가 뭔지도 정확히 몰랐는데 궁금했어요.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등 대다수 국가 기관이고 공채가 있어야만 지원할 수 있었습니다. 계속 지원하다 2007년 국립민속박물관에 합격하게 됐죠.
전시 디자인의 어떤 부분에서 매력을 느꼈나요?
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시각화하면서 서로 다른 영역의 사람을 연결해준다는 점이 매력적이었어요. 내가 종교는 있지만 개인적으로 영혼 채널링에 관심이 많아요.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영매라는 존재는 서로 다른 영역 세계의 언어를 번역해주고 교류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영매는 접신하는 매개체가 아니라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영과 주파수 대역을 잘 맞추는 사람이에요. 에너지들이 공존할 수 있도록 접촉점을 찾아주는 것에 관심이 많은데, 미술관과 박물관의 디자이너 활동과 이런 부분이 연결되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작고 작가의 전시를 할 때 가장 흥미를 느낍니다. 스스로 영매라고 생각해요. 그래야 작가의 주파수를 잘 찾을 수 있으니까요.
영매라는 표현이 재미있으면서 신선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주파수를 맞추려고 하나요?
예를 들어 정기용 건축가 전시를 준비하던 당시에는 '김용주라는 사람이 정기용 건축가의 전시를 디자인하는 게 아니라 내가 정기용 건축가였다면 나의 이야기를 어떻게 펼쳐내길 바랐을까?' 이런 고민을 합니다. 정기용 선생님은 위대한 건축가로 보이기를 바라지 않았을 거예요. 소박하더라도 성실하게 살아간 창작자, 그런 그의 기록을 잘 보여주는 게 어떨까 싶었어요.
전시 디자이너로 첫발을 내디딘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배운 점이 있다면요?
국립중앙박물관은 국보급 유물이 많은 반면 국립민속박물관은 우리 일상과 접촉되어 있는 생활 유물이 많아요. 유물이 가진 이야기를 전시를 통해 어떻게 끌어낼지, 유물을 어떻게 동시대에 접속시킬지에 대한 고민을 깊게 합니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어떤 필요로 이런 형태의 물건을 만들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농경사회 도구를 스마트폰이 일상화된 아이들이 짐작할 수 없는 거죠. 시간과 상황이라는 걸 시대를 넘어 현대로 끌고 와야 해요. 이런 부분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현대미술을 중심으로 다루지만, 시기의 접촉점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고민해요. 박물관에서 전시를 다뤘기 때문에 미술관의 다른 디자이너와 고민하는 지점이 조금 다른 것 같아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일을 하다 보니 '내가 잘하고 있는 건가'라는 고민이 들었어요. 선진 뮤지엄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지 궁금했습니다. 오라는 곳 없이 무작정 미국 보스턴으로 갔습니다. 그나마 익숙한 영어가 낫지 제2외국어는 어려울 것 같았거든요.(웃음) 젊었기 때문에 도전할 수 있었어요. 반겨주는 곳도 없고, 진입 장벽도 상당히 높았어요. 운이 좋게도 중국 도자기 관련 갤러리를 리모델링한다는 소식을 듣고 ‘중국과 한국은 문화 교류 지역이다. 나는 국립 박물관에서 실무 경력이 있다’며 포트폴리오를 다시 들이밀어 피보디 에식스 박물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갑작스레 바뀐 미국이라는 환경에서 어려움도 많았을 듯싶습니다.
처음부터 컴퓨터와 프로그램 장벽이 있었죠. 한국의 국가 기관은 모두 윈도 기반의 컴퓨터와 오토캐드를 사용하던 시기였어요. 지금 디자이너는 맥을 사용합니다. 피보디 에식스 박물관에는 맥 컴퓨터가 있었는데, 사실 나는 디스크를 어디에 넣어야 할지도 몰랐어요. 무엇보다 우리는 센티미터와 밀리미터라는 단위를 사용하는데, 미국은 인치와 피트를 사용해요. 머릿속에서 빨리 변환이 안 됐어요. 비록 이 박물관이 망설이면서 나를 선택했지만, 떠날 때는 나를 붙잡게 하겠다는 마음으로 주말마다 나가 업무를 파악하고 다뤄야 하는 프로그램에 익숙해지기 위해 관련 책을 마스터했어요.
미국 박물관에서 겪은 에피소드를 소개해주세요.
아이리스 아펠Iris Apfel의 주얼리 쇼를 준비하는데, 어느 순간 CCTV가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계 자체를 사람이 원격으로 조정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는데, CCTV가 내 움직임에 따라 위잉 움직이더라고요. 오해받고 싶지 않아서 쇼가 끝날 때까지 주머니가 없는 옷을 입었어요. 내가 미국에 머물던 2009년~ 2010년만 하더라도 한국에 대한 경계의 장벽이 분명 있어요. 슬프고 서럽던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2010년 국립현대미술관에 들어왔습니다. 공간을 전공한 디자이너가 전시 디자인을 맡은 것은 최초라 의아한 시선도 있었다고요. 국립현대미술관이 기존 고수한 시각 인쇄물 위주의 전시 디자인에서 탈피해 좀 더 깊숙이 공간에 관여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은 것은 모두 김용주 디자이너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 변화 과정이 만만치 않았을 듯싶습니다.
보스턴에서 비자 문제로 한국에 들어오게 됐어요. 다시 준비해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국립현대미술관 공고를 봤습니다. 당시 배순훈 관장님의 인터뷰를 우연히 케이블 채널에서 봤는데, 경영인 출신이 미술관을 운영한다는 게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경영 마인드를 갖춘 미술관이 궁금해 미술관 공고를 보자마자 지원했습니다. 현대미술 전시를 구성할 때 공간 전공을 한 사람이 이전에는 없다고 해요. 콘텐츠 큐레이터가 공간을 구획해왔던 거죠. 공간을 읽어내는 눈을 가진 디자이너가 큐레이터와 협업한다면, 전시 전반의 밀도를 올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전시라는 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전문성 있는 업무 세분화와 끊임없는 실험과 연구가 있어야 해요.
국립현대미술관에 입사한 뒤 처음부터 전시에 공간적 시도를 하셨나요?
처음에 "전시 공간 디자인은 김용주 선생님이 한 번 제안해 봐요"하고 믿어 주셨어요. 전시를 통해 더 많은 관람객이 방문하고, 더 오래 전시장에 머물며 즐길 수 있다면, 더 나아가 관람객이 느끼고 교감하는 지점이 많아진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콘텐츠는 큐레이터, 전시 공간은 디자이너 식으로 사실 업무 영역을 무 자르듯 명확하게 나눌 수는 없어요. 공간에 대한 의견을 큐레이터가 줄 때도 있고, 디자이너가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할 때도 있어요.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하는 거죠. 사람들은 어디까지가 큐레이터의 영역이고, 어디까지가 디자이너의 영역인지 묻습니다. 우리는 한 전시를 함께하는 팀으로서 좋은 전시를 만들어내는 것이 최종 목적이에요. 그래서 제가 종종 하는 말인데, 조직에서의 직급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직군에 대한 차별이나 위계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전시 디자인이란 영역이 아직 우리에게는 생소한데, 정확하게 어떤 일을 하나요?
전시 디자이너의 영역은 내부 공간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습니다. 시대적 상황, 시기적 상황, 심리적 상황 등 여러 상황을 디자인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개인적으로 ‘상황 디자이너’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어요. 황용엽 작가 전시 작품 중 얽매여 있는 사람을 표현한 그림이 있었어요. 이 그림을 화이트 큐브에 걸었을 때와 좁고 긴 통로를 지나 조명등이 하나 떨어지는 공간에서 보았을 때, 관람자의 감상의 깊이가 달라져요. 얽매인 상황 속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마음과 다시 자신 안으로 숨어드는 싸움에 대해 그린 작품이 과연 화이트 큐브라는 중립적 공간에서 얼마나 효과적인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작품이 말하는 환경을 설정해주고, 이를 관람자가 만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인위적 상황이라고 비판하지만, 분위기라는 것에서 나오는 가능성이 훨씬 풍부할 수도 있어요. 기획자의 메시지와 전시 디자인의 맥락이 맞는다면, 나는 적극적으로 그런 선택을 하는 편입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디자인팀은 현재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요?
우리 팀에는 디자이너 7명이 있습니다. 나를 포함해 공간 디자인에 세 명, 그래픽 디자인에 네 명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전시 하나에 공간 디자이너 한 명과 그래픽 디자이너 한 명이 짝을 이뤄 움직입니다. 그래픽 디자인 영역 또한 고유의 해석력이 필요한 부분이라 따로 가이드를 통해 그들의 생각을 컨트롤하려고 하지 않아요.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는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시 디자인에 책정된 예산이 궁금해요.
전시마다 예산이 달라요. 일단 기획자가 총예산을 구성합니다. 전시 디자인은 예산 안에서 진행합니다. 예산이 적다고 디자인 품질이 떨어지는 건 아니에요. 적은 비용 안에서 해결책을 찾기 위해 아이디어가 나오기도 해요. 모든 제약 조건은 새로운 해결책을 만드는 고리가 되기도 합니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국립현대미술관으로 넘어오면서 전시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졌나요?
현대미술은 동시대 미술이기도 하고 생물처럼 변하기도 해요. 이런 상황을 유연하게 받아들여야 해요. 유물 전시와 다른 점이죠. 지금 막 발생하는 요구와 급변하는 조건에 대한 대응력을 갖춰야 합니다. 경험이 쌓이고 노하우가 생긴다고 업무가 쉬워지지는 않아요. 그저 많은 해결책과 대응책을 가지고 있을 뿐이죠. 새로운 전시를 만날 때마다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아이디어가 없으면 어쩌나' 늘 공포감이 찾아와요. 지난 10년 동안 100번 이상의 전시를 했을 텐데, 그럼에도 쉽지 않네요.
"사실 저도 이번 전시를 통해 야스거 욘을 처음 알았어요. 국내에는 생소하지만 덴마크 출신의 예술가 아스거 욘은 20세기 중반 사회 참여적 예술 운동을 주도했던 북유럽의 대표 작가입니다. 일생에 거쳐 그래픽 작품, 회화, 도예, 조각, 출판, 직물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작품을 남겼어요. 아스거 욘에게 예술이란 '한정된 엘리트주의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모든 대중이 즐길 수 있는 것'으로 정해진 해석을 거부하고 보는 이에 따라 규정되는 예술이었습니다. 이런 부분이 제 생각과 닿아 있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이런 야스거 욘에게 적합한 집을 지어 주고자 했어요. 공간에서 가장 쉬운 방식은 적절한 사이즈로 분할하면 돼요. 그렇지만 공간이 가진 원래의 표정을 바꾸는 것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천장고가 7m나 되는 전시실에서 아스거 욘의 전시를 진행할 계획이었는데, 아스거 욘의 작품 크기가 작다고 전시장의 크기를 일부러 줄이지 않았어요. 섹션에 따라 벽을 세우는 건 아주 쉬운 방식입니다. 큰 공간감 안에서 작품을 보여주고자 했어요."
"벽 대신 패브릭을 선택했어요. 투과되는 패브릭은 공간 전체의 크기와 볼륨은 그대로 느낄 수 있으면서 관람자가 서 있는 공간에 집중할 수 있는 영역감을 형성시켜 줍니다. 벽에는 작품을 인식할 수 있는 바닥으로부터 3m 높이까지만 회색으로 칠했어요. 만약 천장을 내려 공간 사이즈를 조절했다면 답답했을 거예요. 공간의 볼륨은 살려주면서 심리적으로 관람객이 집중해야 하는 작품의 위치는 설정해 주고자 했습니다."
"큐레이터가 영상을 설치할 블랙 룸을 요청했어요. 작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영상이라 많은 사람이 보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필수로 영상을 관람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기 위해 꽉 막힌 블랙 룸이 아닌 메시 룸으로 공중에 영상 공간을 띄웠어요. 영상의 소리와 이미지가 전시실에 자연스럽게 흘러 관람객에게 야스거 욘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요."
"그간 열린 윤형근 작가의 전시는 작품 크기에 상관없이 하얀 벽에 높이를 맞춰 일렬로 걸려 있는 방식이었어요. 우리가 교복을 입고 열 맞춰 서 있을 때는 다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모두 각자의 개성이 있어요. 말을 걸어보면 나름의 이야기가 술술 나오는데, 말을 걸기 전에는 모두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과 비슷해요. 이전 윤형근 작가의 전시가 물론 좋았지만, 작가의 작품을 같은 방식으로만 보여주는 게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 들었어요."
"무엇보다 윤형근 작가의 작품은 옆모습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물감이 흘러내린 캔버스 자국이 그대로 보이거든요. 이 부분도 보여주고자 했어요."
"화풍이 바뀌는 시기가 있어요. 이전까지는 자각 자신에 대한 성찰이었다면, 민주화운동을 겪은 이후에는 곧게 서 있던 기둥들이 쓰러지고 넘어져 있어요. 물감이 줄줄 흘러내리는 데 마치 눈물처럼 보인 작품이었습니다.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이 그 시대를 아파하고 있다는 걸 체감할 수 있었어요. 윤형근의 전시를 내가 할 만한 자격이 있을까 고민하게 되면서 순간 말을 잃고 말았어요. 작가가 작품 속에서 걸어 나오는 것 같았거든요. 자신이 말한 대로 실천한 그 강직한 모습이 작품에도 그대로 남아 있어요. 무언가가 오래도록 썩어 있는 토양 같기도 하고, 자궁과 무덤 같기도 했어요. 이 작품이 있는 공간에는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나가지 않았으면 해서 일부러 출입구에 기둥을 두고 소수만 움직일 수 있는 구조로 만들었어요. 관람객이 조용히 이 작품과 대면하기를 바랐어요."
"윤형근 작가가 모자를 쓰고 명동을 거닌 적이 있는데, 그 모자가 레닌이 쓰던 모자와 닮았다며 반공법 위반으로 끌려간 적이 있어요.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끌려가서 감찰 대상자가 된 거예요. 윤형근을 찾아오는 이가 하나도 없었대요. 혼자 끊임없이 그림만 그렸다고 해요. 윤형근 작업실을 처음 갔을 때 바닥에서 슬픈 느낌을 받았어요. 끈적한 오일을 머금은 바닥에서 작품이 이야기해주지 않은 외롭고 처절한 시간을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사진가가 수직 촬영으로 바닥을 담았고, 이를 일대일 스케일로 재현했어요."
김용주 디자이너는 랜드마크 뮤지엄이 아니라 마인드마크 뮤지엄이라고 표현한다. 전시라는 매체를 통해 관람객의 마음에 남는 경험과 기억에 머무는 감정을 만들고 싶다는 의미일 테다. 그의 전시 공간은 관람객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고, 슬쩍 장난을 치기도 하고, 때론 진지하게 대면하기도 한다. 전시가 표정을 짓는다. 관람객의 마음에 닻을 내리고 싶은 김용주 디자이너에게 전시에 대한 생각을 찬찬히 들어 보았다.
유홍준 선생님이 2016년 <이중섭: 백년의 신화> 전시를 보고 '우리나라 전시 디스플레이가 언제 이렇게 발전했냐'고 하셨어요. 감회가 새로웠을 것 같아요.
'전시 좋았어'라는 관람객의 말 한마디에는 전시를 이루는 모든 것에 대한 표현이 담겨 있어요. 사실 전시 디스플레이에 대해 따로 언급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전시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누군가에게 역할이 호명돼 그 역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전시를 이루는 요소들이 무엇인지 논의될 수 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었어요. 칭찬 자체의 달콤함보다 전시 디자이너로서 역할에 대한 좌표를 만들어주신 점이 좋았어요.
전시 디자이너로 관람객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요?
관람객은 주체성을 가진 동적 행위자입니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선택적으로 시선을 줍니다. 주변을 배제하고 작품만 남도록 하는 화이트 큐브 방식은 작품을 주변 환경으로부터 탈 맥락화하는 형식이라면, 저는 내러티브, 분위기, 도구적 장치 등을 활용해 작품을 재맥락화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어요. 이를 통해 관람객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전시를 만들고자 합니다.
관람객의 경험과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전시 디자이너로서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관람자의 보행성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관람객이 움직이면서 획득한 시각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지 늘 고민합니다. 움직이는 관람자의 시선이 어느 때는 높게, 어느 때는 낮게 형성될 수도 있어요. 관람객은 움직이는 활성 체인 거죠. 시선이 한 점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계속 움직인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둡니다.
우리는 흔히 미술관의 공간을 '화이트 큐브'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단어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다른 시각적 인지 요소를 덜어내고 대상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얀 여백을 만들어주는 화이트 큐브는 중립적인 전시 설치 방법 중 하나입니다. 여백이라는 공간에서는 조명을 받는 것과 받지 않는 것으로 시각 위계가 설정되기도 해요. 경계 없는 공간이라고 하지만 은연중에 경계가 설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시라는 영역에서 화이트 큐브는 유효한 방식이지만 유일한 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화이트 큐브가 유일한 전시 형식은 아니다'라는 말이 인상적이에요.
화이트 큐브가 효용성이 없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화이트 큐브만의 역할이 있어요. 예를 들어 작품을 소개하는 전시 목적에 있어서는 화이트 큐브 방식이 여전히 유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시를 통해 맥락과 담론을 끌어내야 할 때는 전시 방식이 더 다양하게 접근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전시가 결과물로서가 아니라 과정물로서 작용해야 하는 때는 더 다양한 감상의 장치들을 함께 구성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전시가 작가를 소개하고 작품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던 시절과는 다르죠. 요즘은 전시를 통해 새로운 담론을 생성하고, 이슈를 공유하는 등 공론의 장이 되기도 해요. 이전과 달리 새로운 기대와 기능이 전시에 요구되고 있어요.
화이트 큐브는 관람자와 거리를 유지하며 그들을 수동적 관람의 주체로만 설정한 환경으로 작용할 때가 많아요. 또한 '사람들이 좋다고 말하는 전시'가 아니라 '내 마음속에 기억되는 전시'를 위해 같은 작품을 전시할지라도 차별화 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오랫동안 전시 디자인에 종사하면서 갈수록 '어떻게how to present'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새롭게 해석하고 새로운 가치를 획득하는 것이 차별화입니다. 전시의 오리지널리티는 작품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기획 방향과 형식에서도 획득할 수 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적극적인 전시 방식, 이 문제적이고 흥미로운 장면들에 대해 외부에서는 논쟁이 있는 것 같아요. 주로 화이트 큐브 형식을 옹호하는 입장인데요.
한 분야가 발전하기 위해 여러 생각이 오가는 논쟁은 긍정적이라고 봐요. 어떤 사람은 현대미술이라는 영역에서 전시 디자인이 굳이 필요하냐고 묻기도 해요. 나는 국립 미술관에서 대중을 위한 전시를 하고 있고, 대중이 어떻게 이 전시를 바라볼지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미술 전문가들만을 위해 전시가 열리는 것은 아니에요. 비전문가인 대다수의 관람객을 위해 전시를 해석하고 기획의 메시지를 적극적으로 펼쳐 보여줄 수 있는 관람자 및 전시 매체 연구자들도 필요합니다. 미술계의 시선으로만 전시를 바라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전시는 음악에서 공연과 비슷한 부분이 있어요. 다시 말해 미술에 거리감을 갖고 있는 사람을 위해 작품 감상에 자연스레 다가갈 수 있는 가능성과 환경을 만드는 것은 관람 문화 활성화를 위해 매우 중요합니다. 대다수의 관람객은 전문가가 아닌 예술을 더 총체적으로 경험하고 싶은 마음으로 방문하는 비 예술인입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인증샷을 찍는 사람도 많아졌어요. 이런 현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미술관에 와서 인증샷만 찍는 셀피족을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아요. 디지털 환경이 일반화된 상황에서 내가 그 공간에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은 소소한 흥미, 아름다운 순간을 남기고 싶은 욕구 등이 발생하는 건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이 욕구를 이용해 미술관이 더 많은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는 전시를 만들 수 있다면 오히려 긍정적인 면도 있다고 봐요. 인스타그램에 미술관 인증샷이 올라오는 건 그 자체로 홍보 효과도 있고요. 이런 트렌드를 배제하고 외면할 이유는 없습니다. 미술관 역시 이런 대중의 욕구, 시대의 변화를 직시해야 해요.
디자인이란 단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디자인적이다'라는 말을 '핵심과 본질을 갖춘 상태'가 아니라 '부차적 요소와 장식이 많이 붙은'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분이 종종 있습니다. 디자인이라는 용어에는 '계획하다, 맥락을 찾는다' 같은 뜻이 함축적으로 담겨 있어요. 디자인이란 단어가 오용되고 있다 보니 보통 소모적인 노동이라고 보는 분이 있는 거죠. '디자이너가 어떻게 알아요?','우리는 말 잘 듣는 디자이너가 필요해요'라는 말도 더러 듣습니다. 디자이너는 누군가의 생각을 표현해주는 손 같은 도구가 아니라 그와 함께 설루션을 찾아가는 또 하나의 머리가 되는 협업 존재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디자이너는 클라이언트 기반의 작업을 하다 보니 업무에서 부당함이 발생해도 이에 대해 언급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에요. 이런 현실이 개선되었으면 해요. 비단 디자이너만의 일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요.
작가와 관련된 에피소드도 많을 것 같아요.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최만린 조각가는 내게 별다른 요청 없이 '디스플레이가 아니라 인스톨레이션이 되게 해달라'고 하셨어요. 두 단어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디스플레이는 결과물을 놓는 방식이고, 인스톨레이션은 결과물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줄 수 있는 방식'이라고 모호하고 어려운 말씀을 해주셨죠. 오픈 전 날 휠체어를 타고 전시장을 둘러보시며 '김용주 선생, 이만하면 내 작품도 볼만하죠?'라고 말을 건네주셨는데, 거장의 한마디가 너무나 감사했어요.
제게 잊을 수 없는 또 다른 작가는 김종성 건축가입니다. 오픈이 며칠 남지 않은 상황인데 전시 작품은 별로 걸려 있지 않아 나 스스로 초조하고 불안한 상태였는데, 김종성 선생님이 진행이 많이 안 된 상태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셨어요. 그때 "김용주 선생, 스케줄대로 잘 가고 있는 거죠?"라고만 하셨어요. 보통 사람이라면 화를 내고 언성을 높일 만한 상황인데, 눈물이 날 것 같더라고요. 오픈 1초 전까지 손을 놓지 않고 전시의 전반적인 완성도를 높여야겠다는 결심이 들었습니다.
저렇게 큰 선생님들이 실무자를 믿어준다는 건, 현장에 있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큰 응원과 위로가 됩니다. 내가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 전시 디자인을 맡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 오픈 한 달 전 김종성 선생님이 전화를 주셨어요. "김 선생, 지금쯤은 이런 준비가 되어야 하는데 잘 체크하고 있죠?"이후로도 중요한 일정마다 챙겨주고 참고가 될 만한 책들도 택배로 보내주셨습니다. 이렇게 섬세하게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존경한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합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현재 현대미술뿐만 아니라 디자인, 건축, 영화 같은 소수 장르도 다루고 있다. 이중 가장 활발하게 전시를 펼치고 있는 영역은 건축. 작품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강렬한 현대미술과 달리 건축은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을 좇는 자료 중심의 전시가 대다수다. 이 자료를 관람객에게 호기심이 일어나는 단서가 되게 하느냐 혹은 케케묵은 골동품처럼 보이게 하느냐는 건축 전시를 만드는 사람들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김용주 디자이너가 진두지휘하며 건축 전시에 새로운 물꼬를 튼 전시 공간 속으로 들어가 본다.
<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전의 타이틀 타이포그래피는 제도판에서 그린 손 도면처럼 보이기를 원했어요. 타이틀 글씨의 조합이 하나의 입면도로 느껴질 수 있게끔 구성했죠. 정기용 건축가는 실내 건축에서 도시 건축으로 관점이 확장됐고, 당시 남겨진 학업 과정의 자료가 상당히 좋았어요. 이런 학업적 관심의 변화 과정을 어슷하게 쌓은 상자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정기용 아카이브>의 전시 공간의 콘셉트가 궁금해요.
'길'이었어요. 정기용 건축가가 쓴 책에도 나오는 이야기인데, '할아버지가 바라본 풍경을 아버지가 바라보고 그 풍경을 다시 내가 바라본다. 길은 저장소다'라는 구절이 있어요. 그가 걸어온 삶의 길을 따라 관람자 역시 함께 걸어가는 공간 구성을 생각했어요. 스케치는 궤적이거든요. 그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성실하게 살다간 창작자의 활동, 더불어 건축가라는 직군이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한 계몽가, 정기용 건축가의 이런 면모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랐어요. 이를 긴 축을 두고 창과 테이블의 연속성으로 풀어내고자 했습니다. 전시 디자인의 모티브는 작품의 조형 언어에서 출발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전시실이라는 주어진 조건 속에서 비롯되는 경우도 있어요.
건축 전시에서는 현대미술보다 집기 디자인이 더 두드러져 보여요.
미술 작품은 태생부터 예술 작품 활동이 빚는 결과물로 각자의 완성된 이미지가 있어요. 그러다 보니 전시실에서 제시하는 요소가 시각적 충돌을 일으킬지 않을지에 대해 고려하는 편입니다. 이와 달리 건축 전시에서 전시물로 등장하는 스케치나 자료는 결과물로 완결된 이미지보다 그들의 생각을 구체화시킨 과정물인 경우가 더 많죠. 이런 까닭에 전시된 자료의 숨겨진 가치에 다가서게 하는 '관람 행위 유도' 부분에 더 중점을 두고 고민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건축 전시의 집기가 더 눈에 들어오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정기용 건축가의 전시는 기다란 칸칸이 테이블 속 빼곡하게 들어 있는 자료를 통해 한 사람이 얼마나 성실하게 살았는지, 또한 생각을 진전시키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파고 들었는지 엿볼 수 있도록 집기를 디자인했어요. 관람객은 마주하는 '작품'이 아닌 '자료'를 대하게 되는 거죠. 그렇기에 전시 집기는 공간 속 점유 위치, 형태, 여닫는 방식, 색상, 재질 등 모든 것이 중요해져요. 심미적 측면이 아니라 행위를 유발하는 도구로 집기 디자인에 접근합니다.
이미지를 보니 온도까지 디자인하겠다는 말이 이해가 갑니다.
국내외 작가 30명에게 30년 뒤의 미술관에 대한 아이디어를 소개하는 전시인데, 1m를 1년으로 설정했습니다. 30년 뒤를 접속하려면 30m가 필요한데, 통로는 고작 15m였어요. 축지법 원리처럼 거리를 접어 나가는 방식을 생각했어요. 시간을 압축시킨다는 개념을 넣은 거예요. 일종의 타임 실린더였습니다. 압축된 공간 안에서 활발해진 분자 활동 때문에 내부에서 열이 발생한다는 설정이었어요. 붉은 셀로판지를 통로 유리면에 붙여 보기만 해도 열기가 충만한 붉은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1m가 1년인 공간인데, 30년을 15m 안에 접어 넣다 보니 내부의 밀도가 과밀해져 온도가 상승했다는 콘셉트를 개념도 형식으로 공간에 풀었어요. 이곳은 머물며 전시를 보는 곳이 아니라 미래 미술관을 만나러 가는 압축된 시간 이동 통로에요. 또한 태양의 각도에 따라 공간의 색감과 분위기가 변하면서 공간에 퍼포먼스가 생겼어요. 주어진 공간의 단점을 들여다보면 어느새 전시 디자인의 아이디어가 되는 단서가 될 때가 많아요.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중반에 결성된 건축 집단의 활동을 통해 동시대 한국 건축의 출발선을 살펴보는 전시 <종이와 콘크리트>는 자료뿐인 전시였어요. 이를 공간 안에서 굉장히 유연한 방식으로 풀어냈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획자는 내용을 어떻게 펼칠 것인가를 연구한다면, 전시 디자이너는 물리적으로 주어진 전시실을 어떻게 점유할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내용이 곧 형식이 된다'는 생각으로 전시실 전체를 연극 무대로 설정했어요. 이 전시장에 등장하는 가구는 하나의 배우였습니다. 가구의 배치에 따라 어떤 날은 토론 현장으로 변하기도 했어요. 전시 기간 내내 다양한 토크 프로그램이 열렸는데, 토크 콘텐츠와 방식에 따라 바닥의 표식을 달리해 책상 배열이 바뀌었습니다. 라이브 토론이 가능한 전시 형식을 등장시킨거죠. 건축 전시에서 자료만 나열하는 게 아니라 앞으로의 담론도 전시물로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되려 실제 아카이브는 복도에 두었습니다. 파인 다이닝에 가면 스테이크부터 내놓지 않아요. 전채요리부터 하나씩 차례로 내보냅니다. 전시 구성 역시 관람객의 소화력을 고려해 공간을 정리해요.
공중에 띄운 모니터에서는 내내 옛날 뉴스나 광고 등이 나왔는데, 어떤 장치였나요?
1980~1990년대의 이야기로 관람객이 진입할 수 있도록 당시 대중매체에서 다룬 광고와 뉴스 등을 투사한 거예요. 거대 박스가 마치 구름처럼 떠 있었어요. 구름이나 날씨 같은 건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 조건인데, 당시 시대 분위기가 우리에게 그랬다는 걸 은연중에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복사실을 생중계한 것은 어떤 의미였나요?
보통 전시실에서 자료 복사실은 감추는 영역입니다. 마음에 드는 자료를 복사해 가져가는 행위 자체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복사실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관람객이 복사를 하게 되면 전시실 모니터를 통해 보여주었습니다. 관람객이 퍼포머가 되는 거죠. 개인이 선택한 텍스트를 직접 가지고 가서 내재화하는 지식의 순환 체계를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2011년 출범한 젊은 건축가 포럼 코리아에서 그간 나눈 이슈를 대중과 공유하기 위해 2014년 12월 말에 연 전시였어요. 서촌 세 곳에 나뉘어 있는 공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린 전시가 모두 하나의 주제를 다룬다는 걸 관람객에게 어떻게 인식시킬지가 고민이었습니다. 전시에 참여한 네 설계 사무소마다 전시한 이미지의 정렬 방식을 가로, 세로, 사선 등으로 특징을 부여해 선적인 아이덴티티를 우선 부여하고자 했습니다. 이후 열린 토크 프로그램에서는 선의 방향과 색감으로 설계 사무소마다 키 이미지를 만들었어요.
조도의 양이 풍부하지 않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감도는 공간이었어요. 이런 낡은 공간에서 미래 도시가 어떻게 발전해야 하는지에 대한 건축가의 생각과 이미지를 선언문처럼 구성한 이미지로 배열했습니다. 사실 배너를 그냥 두면 무게감이 없어서 펄럭거려요. 추 대신 형광등을 넣어 천의 무게를 잡아주면서 동시에 조명등 역할까지 하게 했습니다. 빛의 직진성을 극대화하는 미러천이어서 빛이 배너를 타고 올라갔어요. 오래된 공간에 걸린 하얀 천은 귀신의 집처럼 보이는 경우도 하는데, 조명이 함께하니 이야기를 따라가게 하는 장치가 됐어요. 이 전시는 영광스럽게도 도무스 매거진 웹사이트의 메인 화면에도 소개되었어요.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 건축전 한국관 디자인을 진행했어요. 미술관을 벗어나 타국에서 진행하느라 어려움과 도전 의식이 동시에 왔을 것 같아요.
한국에서 만들어간 전시 집기류를 현장에서 조립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는데, 창문 열이 맞지 않아서 애를 먹었습니다. 시작과 끝부분이 거의 20cm나 차이가 나서 설치한 수평 진열대 위에 공을 놓아두면 그대로 굴러갈 것 같은 착시가 생겼어요. 준비한 재료도 없었는데, 옆 독일관이 공사를 빨리 끝내고 남은 목재를 밖에 놓아두었어요. 독일관에 확인받은 다음에 그 목재를 활용해 현장에서 수정을 거쳤습니다. 열흘 넘게 매일 13시간씩 작업했는데, 막상 끝내고 나니 높은 산을 등정하고 개운한 샤워를 한 느낌이었어요. 긴장이 일순간에 풀린 거죠.
어떤 콘셉트로 전시를 풀었나요?
베니스에 있는 한국관은 형태 자체가 특이해요. 나무 바닥에 나무 벽체가 따뜻한 분위기이지만 오래된 별장 같은 느낌도 있어요. 우리가 지금 풀어내야 하는 이야기에 나무라는 소재가 가진 시간성이 유용하지 않다는 판단으로 본래 공간의 마감재를 많이 지웠습니다. 한국의 현대 건축과 국가의 복잡한 관계를 살펴보면서 남겨진 건축 유산의 미래 가치를 논의하는 전시인데, 당시의 도시 개발과 관련된 건축가들의 이상적 아이디어가 담긴 자료가 생각보다 많지 않았어요.
기획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카이브가 부재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자'라고 얘기했어요. 과거에 부재하는 아카이브와 더불어 도래할 미래 아카이브를 보여주기로 했죠. '부재와 도래' 두 단어 모두 무언가 존재하지 않는 수식어입니다. 사실 '무언가 없는 상태'를 전시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웃음). 이런 부분이 개인적으로 새로운 도전이었어요. 건축가들의 도시 개발 이상을 담은 자료, 잡지, 책 등은 거울에 반사된 이미지로만 볼 수 있도록 전시했습니다. 실현되지 못했음을 전시 방식을 통해 상징하고자 했어요. 반면 국가의 요청으로 타협된, 즉 실현된 결과를 기록한 자료들은 오히려 작은 서랍장 속에 담아 갇힌 이미지로 보여주었습니다.
출처
https://blog.naver.com/designpress2016/221694893853
https://blog.naver.com/designpress2016/2216951297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