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은 님을 생각한다지만
나는 님을 잊고저 하여요
잊고저 할수록 생각하기로
행여 잊힐까 하고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잊으려면 생각하고
생각하면 잊히지 아니하니
잊도 말고 생각도 말아볼까요
잊든지 생각든지 내버려두어볼까요
그러나 그리도 아니 되고
끊임없는 생각생각에 님뿐인데 어찌하여요
구태여 잊으려면
잊을 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잠과 죽음뿐이기로
님 두고는 못하여요
아아 잊히지 않는 생각보다
잊고저 하는 그것이 더욱 괴롭습니다
나는 잊고저 - 한용운
바람도 없는 공중에서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이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을 알지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알 수 없어요 - 한용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거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ㅡ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ㅡ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그 사사스러운 일로
정히 닦아온 마음에
얼룩진 그림자를 보내지 말라.
그 마음에는 한 그루 나무를 심어
꽃을 피게 할 일이요
한 마리
학으로 하여
노래를 부르게 할 일이다
대숲에
자취 없이
바람이 쉬어 가고
구름도
흔적 없이
하늘을 지나가듯
어둡고
흐린 날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받들어
그 마음에는 한 마리 작은 나비도
너그럽게 쉬어가게 하라.
그 마음에는 - 신석정
가을에 다들 좋은 시 많이 읽고 마음이 풍요로워지길 바라며!
(내가 보고 타이핑한 거라 오타 있을 수도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