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며 살다 보면 자신의 한 맺힌 삶의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사람을 가끔 만난다. 자신의 기막힌 인생 유전을 쓰기로 하면 소설책 열 권으로도 모자라다는, 보편적인 이 관용구를 들고 나를 찾는 사람의 대부분은 여성이다. 또한 열 권 분량의 절망도 모자라도록 그녀들의 삶을 아슬아슬한 벼랑으로 모는 장본인들은 한결같이 남성이다.
(중략)
어디에서 어디까지를 찍어야 상처의 증거가 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여성들이게 가해지는 억압은 교묘하고 복합적이다. 이런 일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일상적으로 이해되고, 그리하여 일상의 하나로 무심히 잊히는 사회는 진정 옳지 않다.
그래서 강민주가 등장했다. (중략)
나는 가능하면 이 소설이 여성소설의 범주에서만 읽히지 않고 세상의 온갖 불합리와 유형무형의 폭력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에게 함께 읽히기를 감히 소망한다. 그것이 삶을 대하는 진정한 예의라고 믿는다.
- 작가의 말 중에서
다른 어떤 나라도 아닌 한국의 여성 억압의 역사, 여성 혐오의 현 주소를 그대로 담고 있는 책을 한 권 꼽으라면 나는 이 책을 말하고 싶어.
정말 한국에 특화된 여성 혐오의 면모를 아주 조목조목 있는 그대로 담아내면서도,
남성 전유의 착취의 서사를 전복시켜 담은, 아니 이게 1992년 작이라고?????? 라는 말만 나오는 책이야.
이 책을 읽으면서 몇번이나 이 책 맨 뒤 서지 정보 부분을 넘겨봤어 ㅋㅋㅋ 이게 90년대 초반에 나왔다고??????
그리고 한숨을 쉬게 된다. 30년이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의 현실도 그대로 설명하는 책이라서.
모르긴 몰라도 아마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에는 지금처럼 이 책에 공감하는 여성이 많지 않았을거 같아.
나같아도 이렇게 팩트를 나열하는 걸 그때 보았다면 수없이 노출된 가스라이팅에 익숙한 내 머리가 이걸 거부했을거 같거든..
아직도 한국 사회의 여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여성들이, 여혐의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으며 그때도 지금도 건재하는 여혐의 실체를 글자로 바라볼 수 있는 시작점이 이 책이 될 거 같아.
거대한 담론, 이론 다 빼고 우리가 매일 당면하고 있는 그 여성 억압을 우리에게 익숙한 언어로 바라볼 수 있는 책이 될거라고 생각해.
(김지영에 그렇게나 발작하는 한남들은 도대체 이 책은 왜 가만히 냅두지, 라는 생각만 나오지만 그들 중 몇이나 김지영을 읽어봤을까, 이 책의 존재도 모르겠지)
읽는 내내 거침없는 통찰력에 감탄해 허벅지 내려 치느라 허벅지가 너무 아팠어 ㅋㅋㅋ
워낙 유명한 책이지만 등장하는 여성 주인공 한 명 빼고는 모든게 픽션인 이 논픽션을 다들 꼭 읽어보면 좋겠다.
나는 개인적으로 결말이 좀 맘에 안 들었는데, 이 책이 나온 시기와 파격성을 생각해볼 때 충분히 납득이 가기도 했어.
진짜 읽는 내내 한남의 현실을 고발하는 부분들 받아 적느라 일독이 진짜 오래걸렸는데, 머리 박고 외우고 싶었던 부분들 최대한 스포 피해서 몇 부분 남기고 갈게.
p.53 ‘남자는 여자의 등을 밟고 일어서는 일에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비열한 존재다!’
p.109 그러나 나는 박 여사와는 생각이 다르다. 남자가, 이미 검은 발톱을 드러낸 남자가 '뜻밖에' 회개하는 경우는 결코 많지 안다. 아니, 절대 없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남자가 모든 것을 잃었을 대다. 모든 것을 다 잃고 나면 가증스럽게도 다시 여자 마음을 얻어 기대보려는 것이 남자들이란 족속이다. (중략) 인간은 특히 남자는 여자에 대해 반성할 줄 모른다. 알고 있더라도 실천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는 것이 남자다.
p. 196 인간이란, 특히 남자들이란 지구가 자기들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착각 속에 갇혀 사는 까닭에 매번 시시콜콜 상기시켜주지 않으면 금방 자신의 주제를 잊고 만다.
p.225 다 자란 성인 남자를 교육하는 방법이야 그저 한 가지뿐이지요. 저도 별수 없이 그 한 가지 방법을 사용합니다. 가끔 그를 구타하는 수도 있다는 솔직한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는 북어와 같은 급수를 굳이 여자라는 성(性)에 한정 짓고 있습니다만, 사흘에 한 번은 두들겨 패야 다소곳하다는 점에서는 남자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저는 이번 기회에 확인하였답니다.
p.227-228 그러나, 그러나 말입니다. 바로 여러분 남성들이 유포하고 심화시켜온 성의 개방과 확장의 논리에 의하면 그것은 제약 없이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렇기에 낮에는 짐승의 세계로 치닫는 이 땅의 성문화를 개탄하고 밤에는 동료들과 밀실에 앉아 영계를 주문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 아닙니까. 입으로는 열심히 인신매매를 성토하면서 바로 그런 수단으로 공급된 밤의 여자들을 끼고 앉아 세상을 논하는 유능한 여러분들. 술자리에서도 어김없이 집에 전화를 걸어 내 딸과 마누라가 무사한지 잘도 챙기는 착한 여러분들. 기회만 닿으면 남의 부인이건 남의 귀한 외동딸이건 가리지 않고 성의 파트너로 삼고자 하는 여러분들의 그 고귀한 기회균등의 정신 앞에서 저는 참으로 보잘것없는 일 하나를 해치운 것에 불과합니다. (중략) 어떤 남성은 그런 여성들을 사진이나 화면으로 보면서 "야, 그거 맛있겠는데."라는 말까지 한답니다. 그녀들이 미혼이거나 기혼이거나를 가리지 않고 단순히 노리개로만 파악하려는 시각이 그런 야만적인 언사를 낳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맛있겠다니요. 혹시 식인종에서 진화된 종족이 남성 여러분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까지 생기게 하는 그런 언행들이 부끄럼 없이 통과되는 이 사회에서 (중략) 다시 여러분에게 민망한 말씀을 드리자면, 여러분 또한 아무 망설임 없이 백지수표 한 장 정도 날릴 재력을 지녔다면 눈 딱 감고 예쁘다는 누구누구 한 번 침대로 불러 볼까 하는 꿈을 지녔다는 것을 저는 잘 압니다. 그 꿈이 자신에게 이루어지면 영웅다운 호기이고 남에게 이루어지면 졸부들의 쓰레기 같은 짓이 되는 것이지요.
p. 233 그는 이 땅의 많은 여자에게 일어나는 불행과 고통에는 적극적으로 공감하지만 여성차별의 역사와 지배구조의 악의성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특히 현대에 이르러서는 모든 남성이 여성차별에 가담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변했다. 단지 개개인의 성격 차이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하여 사회를 분열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도 했다.
그는 복합화한 사회일수록 여성에 대한 억압 또한 복합적으로 자행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이 단순하지 않은 차별의 역사를 붕괴시킬 힘을 가진 존재는 인간이 아니고 신에 버금가는 어떤 특수한 인물이어야 한다는 점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p. 268 호된 시집살이를 겪은 며느리가 나중에 시어머니가 되어서 어떻게 며느리를 괴롭히는지를 상기시키려고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애써 헐뜯으려 하지만 그 정도는 얼마든지 무시해도 좋은 험담이다. 걱정이 고작 그것뿐이니 험담의 깊이도 얕지 않은가.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세상의 모든 남성과 여성은 여자의 자식이란 사실이다. (중략) 조금만, 아주 조금만 깨어나면 되는 것이다. 어려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갖춰야 할 사전 지식이나 배움도 필요 없다. 단지 아주 조금만 이 세상을 바로 보면 된다. 남자가 여자의 위에 있다는 논리가 허위사실의 유포였다는 것만 알아도 반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언제나 시작이 어렵다는 말은 진리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역시 새겨둘 만하다. 누군가 시작을 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