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거 아닌데 적어봄.
난 해외톨이고 부업으로 대학 강사를 함. 과목은 밝히지 않을게.
다만 일반 교양 중에 하나라 이걸 원해서 듣는 학생은 없어도 무조건 이수해야하는 그런 과목임.
학생 이름을 A라고 할게.
A 첫 인상은 좋았어. 아침 수업이라 5분 정도 늦는 학생이 많았는데 A는 하루도 빠짐없이 출석 3등 안에 들음. 수업 시작 10분 전까지 무조건 출몰.
과제도 100% 제출하고 수업에 참여도 많이 하는 모범 학생 그 자체였어.
그렇다고 뛰어난 학생이었냐 하면, 아니. 능력치는 평범한데 순수 노력으로 모범생이 된 타입.
이 정도면 훌륭한 학생이라 참 예쁠 것 같았는데, 점점 쌔해지더라
첫번째로는
그 반에서 A랑 친한 동기 두명이 있었어. 한명은 남자애, 다른 한명은 여자애. 각자 B, C라고 할게. (같은 학교 출신이라고 함)
맨날 같은 자리에서 셋이서 히히덕거림.
하루는 C(여자애)가 다리에 깁스를 한거야. 놀라서 괜찮냐고 물어봤더니 조금 다쳤대.
근데 하필 그 날이 컴터 랩실에서 작업하는 날이라 단체로 반을 이동해야했거든
친구가 다쳤으면 부축해주거나 보폭 맞춰 걸어가잖아? 여기 분위기상 안 친해도 도와준단 말이야.
근데 비틀거리며 걷는 C를 냅두고 A는 쌩 먼저 랩실로 가버림. 문도 안 잡아줘서 철문에 여자애 코 부딪힐뻔함.
여기서 처음 ?했지만, 생각이 짧았나보지하고 내가 걍 잡아줌.
두번째로는
학기 처음으로 1대1 피드백을 주는 날이었음.
난 점수를 후하게 주는 편임. 꼬박꼬박 참여만 하면 최소 비는 받아갈 수 있음.
좀 못해도 장점을 쥐어짜서 말해줌. 그러다 날개 달아서 확 잘하는 애들도 분명 있거든.
근데 얘는 ㅜ 내가 엄청 포장해서 장점을 말해주니까 씨익 웃고 있어. 당연하단 듯이.
그러다 지적으로 넘어갔더니 표정이 썩음. 어떻게 나한테 지적을 할 수가 있지, 믿기지 않는 표정임.
하도 살벌하게 표정이 달라져서 논리적으로 납득시키느라 힘 뺌.
막바지엔 수긍하는 표정이라 마무리 하려는데, 갑자기 자기는 __이 관심있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녜.
여기서 ___는 대학원생도 갖기 어려운 스펙. 얘는 대1.
"너무 하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해야할지 모르겠다" 가 아니라
"내 천재성을 썩히면 안되니까 함 찍먹해볼까? 소스 좀 달라" 이런 뉘앙스.
어이없어서 무슨무슨 사이트 몇개 알려주고 보냄.
세번째로는
아까 언급한 B란 학생이 좀 결석이 잦았어. 늦잠 자서 지각하기도 하고.
A, B, C 이렇게 친하니까 연락이 안 되면 가끔 A나 C한테 물어봤단 말이야
하루는 또 일대일로 피드백 주는 날인데 B가 안 나옴.
그래서 피드백 주면서 겸사겸사 A한테 행방을 물어봄. 아마 또 자고 있겠죠란 답변이 돌아옴.
웃어넘기고 있는데, A가 대뜸 자긴 이 학교 졸업하면 "그런 애들"이랑 안 어울릴거래
자기랑 "태생적으로 다른 인간"들이고 그런 인간이랑 인맥을 구축해봤자 인생에 하등 도움이 안될거라고.
속으로 이런 생각하는 사람들은 은근 많겠지? 근데 현실에서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 봄.
우스개소리도 아니고 사뭇 진지해서 소름돋음. 이때부터 좀 소시오 같다고 생각함.
네번째로는
수업 중에 "제비뽑기"란 단편 소설을 다뤘어. 헝거게임 좋아하는 톨들은 알지도 몰라. 오래됐지만 나름 유명한 소설임.
한 평온해 보이는 마을에 매년 제비 뽑기 의식이 거행되는데, 제비뽑기에 당첨된 마을사람은 돌에 맞아 죽는 내용
이 미친 의식을 빼고는 평범한 마을으로 묘사돼서 더 기괴함.
이 소설의 일부분을 1인칭 시점으로 바꿔서 적어보는 과제를 내줬는데
A가 본인 과제를 발표하겠다고 지원한거야
근데 그 내용이, 소설 막바지에 돌에 맞아죽는 여인 시점으로 전개되는 엔딩이었음. 끔찍한 내용을 무슨 개그물처럼 적었네?
여인이 이건 불공평하다고 비명을 지르는 부분부터 시작하는데, 얘가 읽다말고 폭소를 하는거야.......
너무 웃어서 읽기 힘들어 할 정도로
다른 애들은 남자고 여자고 아무도 안 웃는데, 본인만 자지러지며 읽은 내용이:
"마지막으로 내 눈에 비친 것은 가장 큰 돌을 두 손으로 번쩍 들고 찢어지게 웃고 있는 남편의 모습이었다. 내 머리가 으스러지기 전에..."
분위기 수습하기 힘들었음. 대놓고 불쾌해하는 학생도 있었음.
이 시점부터 A 자체가 껄끄러워서 평범하게 대했지만 속으로 힘들었어.
마지막
학기 말.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은 썰.
마지막 수업을 기념하여 재미로 넌센스 문제를 냈어:
50마리의 거대한 ___ 와 작은 ___ 한 마리가 붙으면 누가 이길까?
정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라 애들끼리 신나서 말다툼하고 난리남.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유쾌했음. 진지함 X.
근데 얘가 또 질문 있다고 손을 드네 ㅜ ... 내키진 않지만 웃으면서 뭐냐고 물어봄.
또 신난 표정으로 "이 가설을 세울 때 폭력을 써도 되냐? 써도 된다면 어느 수준?" 이런 질문을 함.
그러면서 총이나 decapitation 언급을 함.
또 또 수습하기 힘듬. 설령 친구끼리 저런 농담을 해도 수업 중에 하는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음.
사실 이 문제는 모 대학이 입시 문제로 낸 질문이거든?
그걸 바탕으로 "정답을 어떻게 풀어가든 결국 대학 입시가 목표이기 때문에, 논리적인 답변을 가져와도 학교에 그런 모습을 보이는건 추천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무마하려고 했음. 그런 모습 = 반사회적인 행동.
대학도 이상한 사람 걸러내야 하니까 위험 신호에 제법 민감하게 반응함
잘못된 생각이라 말해봤자 씨알도 안 먹히니까 최대한 A가 납득하게끔 설명한거
그랬더니 폭력만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면 어떡하냔 질문이 돌아옴....
효율이 꼭 답인건 아니라고 했는데
그냥 저 학생 얼굴을 보기 힘들었고 소름 끼쳤음.
아무 일도 없었고 별거 아닌거 알지만 진짜 소시오는 저런 느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