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나의 아저씨>에 대한 평이 극과 극인 것은 호평과 악평으로 나뉘기 때문만은 아니다. 두 입장의 비평은 놀라울 정도로 서로 다른 지평 위에 서 있다. 비판하는 쪽에서 이곳의 한국 사회에서 실제 아저씨들이 지닌 권력과 폭력이 지워져 있는 문맥을 문제 삼는다면, 옹호하는 쪽에선 드라마가 의도하고 실제로 꽤 잘 구현되는 상처 입은 삶들에 대한 위로를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공통의 논의를 위한 질문은 다음과 같이 제기될 수 있다. <나의 아저씨>에 깔린 아저씨 세대에 대한 연민의 기만성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에서 고난받는 개인들에 대한 위로라는 주제의식 안에서 중화될 수 있는 것일까. 다시 말해 이 텍스트 안의 명백한 성맹적(gender blind) 요소는 약점이되 지엽적인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자본주의 정글에서 탈락해 백수로 지내면서도 꼬박꼬박 어머니 요순이 해주는 밥을 당연하듯 먹고 있는 상훈은 어떠한가. 여성은 전문직이어도 남편의 밥을 해주고, 남성은 백수가 되어도 여성이 해주는 밥을 먹는다. 가부장제 안에서 ‘가장’으로서의 남성이 자본주의하의 세상에서 시달리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바로 그 자본주의 체제라는 것이 여성들을 가사 노동에 갈아 넣어 유지되는 시스템이라는 사실에 대해 드라마는 놀랍도록 침묵한다. 드라마 안에서 울분을 토해내는 건 오직 남성들이다.
직장인 남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과 직장인 남성만 발언할 기회를 주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나의 아저씨>는 후자다. 이러한 비대칭성은 굳이 현실 40~50대 남성이 지닌 성별 권력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미 텍스트 안에서 하나의 권력으로 기능한다. <미생>의 장그래-오상식 구도와 흡사하면서도 다른 이지안-박동훈의 관계는 이 차이를 잘 보여준다. 처음부터 정서적 이입이 가능했던 장그래와 달리 지안은 속을 알 수 없는 존재이며, 어떤 의미로든 호감 가지 않는 인물이다. 무례하며 범법행위도 쉽게 저지른다. <나의 아저씨>는 그런 지안을 시청자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동훈이라는 우회로를 거친다. 모두가 지안의 위악을 이해하지 못할 때 동훈만이 동료들을 향해 더 정확히는 시청자를 향해 지안을 위해 변명해준다. “상처 받은 아이들은 너무 일찍 커버려”라고. 동훈과 건축업자와의 실랑이를 도청하던 지안이 가족에 대한 동훈의 말을 들으며 자신이 할머니를 위해 살인을 무릅쓴 순간을 떠올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지안이 도청을 통해 동훈을 속속들이 알 수 있는 반면 동훈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은 서사적 트릭일 뿐이다. 정작 도청을 통해 동훈에게 감화되는 것은 지안이며, 지안의 속을 간파하고 드러내는 것은 동훈이다. 20대 여성 지안이 겪는 혹독한 삶은 기성세대인 동훈의 자상한 시선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 과정은 일면 따뜻하고 휴머니즘적이지만, 모든 정서적 이입이 동훈을 통해서만 가능하기에 지안이 겪는 부조리한 현실조차 동훈의 주관적 관점 안에서 쉽게 상호이해 가능한 것이 되어버린다.
박해영 작가의 전작 tvN <또 오해영>에서 줄곧 등장했던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 구도가 불평등한 구조에 대한 인식을 대체하는 건 그래서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회식 자리에서 여성이 당연한 듯 고기를 굽는 상황에서도 갈등은 여성 대 남성이 아닌, 파견직이고 더 나이 어린 지안이 고기를 굽지 않는 것에 대한 여성 직원의 분노로 표출된다. 남편보다 잘나가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미움의 정서는 가부장제에 대한 문제제기가 아닌 윤희에 대한 요순의 불편함으로 그려지며, 이혼 후 도준영(김영민)과의 결혼까지 염두에 뒀던 윤희의 정상 가족을 이루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 역시 남성들은 지워진 채 지안에 대한 윤희의 적대로 드러난다. 동훈 삼형제로 대표되는 ‘나의 아저씨들’은 자신들이 눌러 앉은 구조적 우위에 서서 구조적 약자인 여성들끼리의 싸움을 멀뚱멀뚱 쳐다보는 한에서 무해하게 그려진다. 이 드라마가 사랑이 아닌 사람의 이야기를 꽤 야심차게 그려내려 한 건 맞다. 하지만 그 아저씨들이 젠더 권력과 경제 권력의 맥락에서 벗어나 오직 사람의 얼굴로 등장하기 위해선 그들이 여성을 착취하며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을 모르는 척해야만 한다. 이 선택적 무지를 과연 휴머니즘이라 칭해도 될까.
http://v.entertain.media.daum.net/v/20180427170249884?f=m
자본주의 정글에서 탈락해 백수로 지내면서도 꼬박꼬박 어머니 요순이 해주는 밥을 당연하듯 먹고 있는 상훈은 어떠한가. 여성은 전문직이어도 남편의 밥을 해주고, 남성은 백수가 되어도 여성이 해주는 밥을 먹는다. 가부장제 안에서 ‘가장’으로서의 남성이 자본주의하의 세상에서 시달리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바로 그 자본주의 체제라는 것이 여성들을 가사 노동에 갈아 넣어 유지되는 시스템이라는 사실에 대해 드라마는 놀랍도록 침묵한다. 드라마 안에서 울분을 토해내는 건 오직 남성들이다.
직장인 남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과 직장인 남성만 발언할 기회를 주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나의 아저씨>는 후자다. 이러한 비대칭성은 굳이 현실 40~50대 남성이 지닌 성별 권력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미 텍스트 안에서 하나의 권력으로 기능한다. <미생>의 장그래-오상식 구도와 흡사하면서도 다른 이지안-박동훈의 관계는 이 차이를 잘 보여준다. 처음부터 정서적 이입이 가능했던 장그래와 달리 지안은 속을 알 수 없는 존재이며, 어떤 의미로든 호감 가지 않는 인물이다. 무례하며 범법행위도 쉽게 저지른다. <나의 아저씨>는 그런 지안을 시청자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동훈이라는 우회로를 거친다. 모두가 지안의 위악을 이해하지 못할 때 동훈만이 동료들을 향해 더 정확히는 시청자를 향해 지안을 위해 변명해준다. “상처 받은 아이들은 너무 일찍 커버려”라고. 동훈과 건축업자와의 실랑이를 도청하던 지안이 가족에 대한 동훈의 말을 들으며 자신이 할머니를 위해 살인을 무릅쓴 순간을 떠올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지안이 도청을 통해 동훈을 속속들이 알 수 있는 반면 동훈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은 서사적 트릭일 뿐이다. 정작 도청을 통해 동훈에게 감화되는 것은 지안이며, 지안의 속을 간파하고 드러내는 것은 동훈이다. 20대 여성 지안이 겪는 혹독한 삶은 기성세대인 동훈의 자상한 시선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 과정은 일면 따뜻하고 휴머니즘적이지만, 모든 정서적 이입이 동훈을 통해서만 가능하기에 지안이 겪는 부조리한 현실조차 동훈의 주관적 관점 안에서 쉽게 상호이해 가능한 것이 되어버린다.
박해영 작가의 전작 tvN <또 오해영>에서 줄곧 등장했던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 구도가 불평등한 구조에 대한 인식을 대체하는 건 그래서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회식 자리에서 여성이 당연한 듯 고기를 굽는 상황에서도 갈등은 여성 대 남성이 아닌, 파견직이고 더 나이 어린 지안이 고기를 굽지 않는 것에 대한 여성 직원의 분노로 표출된다. 남편보다 잘나가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미움의 정서는 가부장제에 대한 문제제기가 아닌 윤희에 대한 요순의 불편함으로 그려지며, 이혼 후 도준영(김영민)과의 결혼까지 염두에 뒀던 윤희의 정상 가족을 이루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 역시 남성들은 지워진 채 지안에 대한 윤희의 적대로 드러난다. 동훈 삼형제로 대표되는 ‘나의 아저씨들’은 자신들이 눌러 앉은 구조적 우위에 서서 구조적 약자인 여성들끼리의 싸움을 멀뚱멀뚱 쳐다보는 한에서 무해하게 그려진다. 이 드라마가 사랑이 아닌 사람의 이야기를 꽤 야심차게 그려내려 한 건 맞다. 하지만 그 아저씨들이 젠더 권력과 경제 권력의 맥락에서 벗어나 오직 사람의 얼굴로 등장하기 위해선 그들이 여성을 착취하며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을 모르는 척해야만 한다. 이 선택적 무지를 과연 휴머니즘이라 칭해도 될까.
http://v.entertain.media.daum.net/v/20180427170249884?f=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