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

이건 내가 겪은 이야기이다.

 

 

 


1

 

내 아빠의 사업은 IMF 때 무참히 몰락했다.

 

아빠는 신용불량자가 되었고 내 10대 시절 기억 속에 무능력한 모습으로 각인되었다.

신용불량자는 정식으로 직업을 얻지 못했다.

 

게다가 아빠는 어리석은 자존심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이 실패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알바라도 하며 돈을 보태면 좋았을 텐데, 어떻게든 사장님 소리를 듣겠다고 사업에 관여했다가 다시 망하기 일쑤였다.

 

아빠는 대낮에도 집 안에서 TV를 보고 신문을 읽으며 빈둥거렸다.

그러면서 자기가 집에 있다는 사실을 엄마한텐 말하지 말라는 약속을 시켰다.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아빠 때문에 몰컴을 하지 못해서 짜증을 느낄 뿐이었다.

 

엄마는 정상가족에서 한참 벗어난 우리 가족의 가장 비슷한 것이었다.

엄마는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빠가 쌓은 빚을 갚고 생활비를 벌었다.

심지어 집안일을 하는 것도 엄마였다.

 

엄마는 돈을 벌어야 할 사람이 아니었다. 엄마는 공부를 하는 사람이었다.

대학교 시간강사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종이 아니지만, 엄마는 박사학위를 받기도 전부터 매학기 세 개 이상의 수업을 맡았다.

학자가 실적을 쌓기 위해선 연구를 하고 논문을 써야 한다.

엄마는 그럴 수 없었다.

 

당시 엄마는 삶이 주는 부조리한 불행의 무게에 짓눌려 있었다.

나는 피로와 고통을 숨기고 있던 엄마의 무표정한 얼굴을 잘 기억한다.

 

사업이 망했을 때, 우리 가족은 이사를 갔다.

새로운 집은 전의 집과 여러모로 대조되었다.

원래 우리가 살던 곳은 일산 신도시에 있는 50평짜리 집이었다.

그런데 이사를 간 장소는 서울시 노원구 중계동에 있는 곳으로, 30평을 간신히 넘었다.

 

중계동은 잘 사는 사람들의 집결지는 아니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살았던 아파트 단지도 낡고 더러운 곳이었다.

단지에 딸린 상가는 시장이나 다름없었고, 지하 주차장도 없어서 아파트를 나오면 빽빽하게 도열한 자동차를 피해 걸어야 했다.

 

그러나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뒤바뀐 환경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새로운 학교에 적응하는 것만이 관건이었다.

 

아이들은 이전에 다녔던 학교의 애들보다 조금 더 거칠었고, 무서웠다.

전학생의 눈으로 봤기 때문에 그런 인상을 받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나랑 친해진 아이들의 돌발적이고 충동적인 행동을 볼 때도 같은 인상을 받았다.

마음이 어딘가 병들어 있다. 분명 그런 생각을 한 기억이 있다.

그것을 계급적 배경과 연관시켜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나는 무척 소심한 성격이었지만, 곧 몇몇 아이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수많은 장소들을 쏘다녔다.

 

아직 기억하는 것은 아파트 안의 놀이터에서 위험하게 놀았던 일이다.

많이들 해봤을 거다. 그네를 최대한 높이 탄 뒤 뛰어내려서, 가장 멀리까지 날아간 사람이 승리하는 놀이였다.

지금도 별안간 무릎이 아플 일이 있으면 그게 원인이 아닌가 생각한다.

 

당시 나랑 가장 친했던 아이는 얼굴이 다소 검고 이국적이었다.

그 애는 성격이 무척 활발했는데, 못된 측면도 가지고 있었다.

우리 모두 애증을 가지고 대한 친구가 있었을 것이다. 그 애가 딱 그러했다.

얼마나 싫었는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간 후, 한 번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가 인사를 하자 나는 고개를 돌려 무시해버렸다.

 

중계동에 살았던 기간은 반년이었다.

겨울이 다가올 즈음, 우리 가족은 근처에 있는 하계동으로 이사를 갔다.

 

하계동은 중계동보다 조금 더 높은 지대에 있다.

그래서 폭우가 쏟아질 때 중계동 집 부근엔 물이 상당히 찼지만, 하계동 집은 멀쩡했다.

중계동 집과 고작 500미터 정도 차이가 날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런 차이가 있었다.

 

학교도 새로운 곳으로 배정되었다.

수영장이 학교 안에 있는 곳이었으니, 그리 나쁜 곳은 아니었다.

 

거주자들이 조금 덜 가난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아이들의 성격도 달라졌다.

물론 성격이 나쁜 애들은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전반적으로 어둡다는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

 

나는 그곳의 아이들과 곧 친해졌고, 점점 활발한 성격으로 바뀌어갔다.

 

우리 가족은 하계동 집에서 아주 오래 살았다.

나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전부 그 근처에서 다녔다. 멀리 있는 대학교를 다닐 때도 하계동에서 통학을 했다.

집 앞에 CGV가 두 개나 생기고 미술관이 건설되며 점점 발전하는 것까지 전부 지켜보았다.

 

그 동안 우리 집은 계속 가난한 채였다.

무능한 아빠, 자신만의 시간이라고는 전혀 없이 일을 하는 엄마, 소리를 지르며 아빠를 비난하는 엄마의 목소리.

 

그래도 누나와 나는 가난을 의식하지 않으며 자랐다.

아마 엄마가 그런 말을 최대한 우리에게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누나와 나 모두 각자 부침은 있었지만, 대체로 돈과는 무관한 것들, 즉 학교생활이나 장래에 관한 것이었다.

 

누나와 나는 만화책방을 열심히 다니는 어린 오타쿠였다.

엄마가 만화책을 싫어했기에, 우리는 허리쪽 옷 안에 만화책들을 숨기는 기술을 익혔다.

 

누나는 이 방면에 뛰어났다. 허벅지 쪽에 있는 것들까지 합해 열 개의 만화들을 숨긴 적도 있다.

한번은 내가 그걸 따라해 보려다가 엄마 앞에서 만화책을 우르르 쏟아내고는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우리는 우리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엄마와 아빠와는 무관하게 우리의 삶을 꾸렸다.

우리의 삶은 2000년대 초반에 꽃을 피우고 있던 인터넷 세계 속에 있었다. 하가렌, 새벽 몰컴, 누나의 블로그, 코믹월드, 고전게임 등등.

가난이나 부모님의 고통 같은 것은 우리의 삶 밖에서 우리를 제약하는 요소에 불과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안방에 있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것은 가로로 놓인 A4용지 한 장이었고, 안방 문 위의 벽에 엉성하게 붙어 있었다.

 

종이엔 이상한 필체로 누군지 모를 이름이 쓰여 있었다.

한 번만 쓰인 게 아니다. 이름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반복되었다.

예컨대 이름이 ‘박웅철’이라 한다면, 이런 모습이었다.

 

 


박웅철 박웅철  박웅철 박웅철박웅철 박웅철

박웅철 박웅철 박웅철박웅철 박웅철 박웅철

 박웅철 박웅철 박웅철  박웅철  박웅철 박웅

철박웅철 박웅철박웅철 박웅철 박웅철박웅철

박웅철 박웅철 박웅철 박웅철 박웅철 박웅철

 


 

나는 매일 그것을 보면서도 이 종이의 기이함을 느끼지 못했다.

이 종이는 몇 년 뒤에 떼어졌다.

 

종이의 정체는 좀 더 큰 뒤에 알았다.

고등학생 때였던가, 나는 어느 날 엄마한테 그것이 대체 뭐였는지 물어보았다.

엄마는 그것이 무당집인가 점집에서 받은 것이었다고 대답했다.

집안에 잘 되는 일이 하나도 없으니까 너무 힘들어서 그런 곳을 찾아갔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작은 충격을 받았다.

엄마는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지식인이다.

나는 그런 엄마를 합리적인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요컨대 내겐 엄마가 미신에 의존했다는 사실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또 나는 그제서야 그 종이가 이상하고 기이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 같다.

내 머릿속에서 아무런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던, 일상적으로 보고 지나치던 것이 사실은 주술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럼 그 종이에 쓰여 있는 박웅철은 누구고, 그 이름이 왜 우리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건가.

내가 묻자, 엄마는 자기도 그건 모른다고 말했다.


내가 그걸 물었던가?


그랬던 것 같다.

 

 


 

2

 

초등학교 3학년 때 중계동에서 지냈던 6개월은 마냥 우중충하고 불쾌한 기억으로 남지는 않았다.

힘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강하다.

나 역시 새로운 환경에 부딪히면서 나의 영역과 루틴을 만들고, 나름대로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적응하는 데 성공했다.

 

꽤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했다.

 

입대하기 직전쯤이니 내가 이십대 초일 때 있었던 일이다.

나는 엄마와 집 근처에서 외식을 한 후 배를 꺼뜨릴 겸 산책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옛 추억들을 들추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던 중, 화제는 중계동에서 지낸 시절에 대한 것으로 옮겨졌다.

 

엄마는 그러고 보니 내가 너네 담임한테 촌지를 줘야 했던 일도 있었지, 하고 말을 꺼냈다.

나는 그런 일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당황하며 그게 뭐냐고 물었다.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는 이런 것이었다.

 

중계동으로 이사를 온 후, 학교를 다니는 나의 표정은 어두웠다.

하지만 파탄에 이르던 당시 우리 집의 재정상태 때문에 엄마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엄마에겐 우리의 학교생활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일은 세 달쯤 뒤에 터졌다. 어느 날 내가 학교를 가기 전에 울음을 터뜨리며 학교에 가기 싫다고 한 것이다.

왜냐고 물어보니, 나는 담임선생님이 나를 괴롭힌다고 말했다.

 

엄마는 이 사건에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자신의 일에 몰두한 나머지 자식들의 일에 완전히 무관심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고민한 끝에, 엄마는 내 담임을 찾아가 촌지를 건네주었다.

그게 원인이었을 것이라는 엄마의 추측은 옳았다. 그 이후 담임의 괴롭힘은 사라졌다.

우리 가족이 고작 반년 만에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이사를 간 이유도 그 일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는 내내 경악에 차 있었다.

엄마가 거짓말을 하는 건가 생각하고 있었다.

 

나에겐 담임이 나를 괴롭힌 기억이 없었다.

 

삼 개월 간이라 했다. 일시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 동안 눈에 띄게 표정이 어두웠다면, 강렬한 기억이었어야 한다.

 

하지만 괴롭힘도, 심지어 담임의 얼굴도 내 기억 속엔 없다.

 

그 무렵의 기억이 통째로 잘려나간 건가?

그렇지는 않았다.


그네를 타고 멀리까지 뛰어내리는 시합. 성격이 더러운 친구. 다혈질적이고 불안정했던 친구. 어딘가 어두운 아이들. 아파트 상가의 만화방에 들락거리던 기억. 초등학교까지 오가던 길.

 

이런 것들은 모두 또렷하게 박혀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어두운 기억이 아니라, 약간의 향수까지 느껴지는 편안한 기억이었다.

여기에서 단 하나, 나를 세 달 동안 괴롭혔던 담임의 기억만이 도려내져 있었다.

 

그때 나에게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나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 어떤 종류의 악몽을 주기적으로 꿨다.

 

설명하기 어려운, 매우 추상적인 악몽이다.

거친 선과 부드러운 선으로 이루어진 세계. 거친 감각과 부드러운 감각.

텅 빈 하얀 세계 속 아주 거대한 한 단어. 성벽처럼 세워진 위압적인 느낌.

 

이 이미지는 아주 오랫동안 꿈속에서 내게 압도적인 공포를 주었다.

어렸을 때는 이것 때문에 잠드는 것을 두려워하기도 했다.

다행히 십대를 거치며 악몽은 뜸해졌고, 나는 잠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이 이미지의 정체가 뭔지 모르지만 그 기원만은 알고 있다.

초등학교 3학년 여름, 더위를 먹었던 어느 날 밤에 꾼 악몽이다.

그때 나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엄마와 아빠가 있는 안방에 찾아가 공포를 호소하고, 다시 잠들었다 깨는 것을 반복했다.

 

두려움에 떨면서 나는 계속 헛소리를 지껄였다.

일본이 무서워, 영국이 무서워.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날 밤의 공포와 내가 내뱉은 말만은 너무 강렬해서 기억 속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초등학교 3학년 여름이었다.

그건 우리가 중계동으로 이사를 온 지 대충 삼 개월쯤 지났을 때였다.

악몽을 꾼 시점과 담임의 괴롭힘이 끝난 시점이 언제였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두 시점은 어느 정도 일치하고 있었다.

이게 우연일 리는 없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며칠 뒤에 악몽을 꾸었다.

 

악몽 속에서 나는 수업 시간에 나대고 수업을 방해하는 시끄러운 초등학생이었다.

나를 싫어했던 담임선생님은 나의 방해가 선을 넘어서자, 분노를 터뜨리며 학교에 남으라고 명령했다.

나는 웃음으로 받아넘기려 했지만 불안을 느꼈다.

 

장면이 바뀌고 밤이 되었다.

나는 학교에 있는 침대 위에 있었다. 누군가의 발소리가 다가오고 있었고, 나는 두려움에 떨었다.

나는 그것이 포식자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소리가 커질 때마다 공포는 점점 커졌다.

 

이윽고 담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내 몸을 만지기 시작했다.


나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절망과, 이 모든 것이 끝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정점에 달했을 때, 악몽은 끝이 났다.

 

이 악몽은 무슨 의미였을까?

실제로 일어난 일을 정확히 반영한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고민이 상상력을 자극한 결과였을 수 있다.

 

그렇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나의 무의식이 두렵게 느껴졌다.

 


 

 

3

 

나는 앞에서 들려준 두 이야기가 서로 무관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대학원생인 나는 이번 학기에 수업 조교 일을 하며 만난 다른 조교와 가까워졌다.

그도 대학원생이었고,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대화를 나누던 중, 나는 그가 노원구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향을 만난 반가움에 우리는 여러 사적인 정보들을 교환했다.

 

그 정보들 중 하나가 내 관심을 끌었다.

그는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잠깐 다녔던 바로 그 학교를 졸업했다고 했다.

 

나는 그곳의 전경과 선생님들이 궁금하다는 등 엉성한 핑계를 대며 초등학교 졸업앨범을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나를 괴롭힌 선생이 누군지는 모르더라도 무의식적으로 낯이 익은 얼굴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속셈이었다.

 

그는 어려운 부탁도 아니니 가져오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는 앨범을 가져오는 것을 몇 차례 까먹었고, 며칠 전에 비로소 가져왔다.

나는 대강의실 맨 뒷자리에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앨범을 받아들었다.

강의실 앞에선 교수님이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앨범을 펼치고, 책 앞부분에 나열되어 있는 선생님들의 얼굴을 손으로 따라갔다.

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그렇지 않으면 무의식 속 기억이 그 얼굴을 놓쳐버릴 수 있으니까.

 

내 손가락은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어떤 것을 보고는 얼어붙었다.

 

내 손가락은 약간 통통한 중년 남성의 사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본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 아래에,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 남성의 이름이었다.

 

 


박웅철 선생님

 


 

손이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다.

 

머리는 눈이 보는 것을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 이름이 뭐였지? 왜 낯이 익지?

맞다. 그거. 안방 문 위에 있었던 그 종이. 그 부적. 주술.

그런데 그게 왜 여기 있지? 이게 뭘 의미하는 거지?

 

두려움과 혼란 속에서 많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뭐가 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서 뛰쳐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겉으로 평정을 유지하며 초조하게 강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나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한 손으로는 핸드폰을 붙잡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전화를 받은 엄마에게, 나는 다급히 물었다.

옛날에 안방 문 위에 붙였던 종이 기억하냐고. 박웅철이라는 이름이 잔뜩 쓰여 있던. 엄마가 너무 힘들어서 샀다고 했던 그거.

 

엄마의 대답은 내 이해 밖에 있었다.

 


엄마는 그런 건 없었다고 했다.

 

 

소름끼치는 감각이 등을 타고 올랐다.

나는 그럴 리가 없다고 따져 묻지도 못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 뒤에, 나는 아빠와 누나에게도 전화를 걸어 똑같이 물었다.

대답은 같았다.

아빠는 종이의 존재를 부정했다.

누나는 그런 이상한 게 있었다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고 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가 온몸을 휘감았다.

나 자신이 살벌한 위험에 둘러싸인 연약한 몸처럼 느껴져서, 흠칫거리며 주변을 계속 살폈다.

 

내 기억 속에는 분명 그 종이가 있었다.

그 이름이 빼곡히 적힌 종이. 안방 문 위에 테이프로 붙어 있었던 그것.

그 모습이 당장이라도 눈앞에 그려졌다.

 

그게 거짓이라면, 그 기억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를 괴롭힌 사람의 이름이 적힌 종이는 왜 내 기억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가.

 

오랫동안 간직한 악몽, 꿈속에서 당한 폭력, 잊어버린 기억, 허구의 기억.

여러 개의 파편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뒤섞여 있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모르겠다.

 

일단 그 초등학교에 전화를 걸어볼 생각이다.

그 선생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계속 재직 중일 수도 있고, 퇴직을 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실종 상태일 수 있다. 누가 알까.

 

하지만 그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그가 아니라 나다.

 

지금 나는 아주 모호한 두려움을 느낀다.

앞으로 계속 안고 가야 할 두려움이다.

 

기억이란 나를 지탱해주는 것이 아니었고,

과거란 현재의 흔들림 없는 기반이 아니었다.

 

그것을 직접 경험한 사람은 이전과 같을 수 없다.

 

내 발밑엔 텅 빈 그림자가 있다.

발을 잘못 내딛은 순간 그림자는 투명한 바닥 속으로 나를 빨아들일 것이다.

 

나는 발밑이 꺼지는 순간 느끼는 부유감과 공포를 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바닥을 보고 걸어야 한다.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불안을 안고 내딛는다.






  • tory_1 2019.11.12 10:42
    이름이 적힌 종이는 대체 뭐였던 거지ㅠㅠㅠㅠ
  • tory_2 2019.11.12 10:49
    헐...대체 뭘까 ㅠㅠ
  • tory_3 2019.11.12 14:23
    저주종이인가!
  • tory_4 2019.11.12 14:28

    큰 트라우마가 있으면 어린나이엔 기억을 지우거나 바꾸기도 한다던데

    그 선생이란 사람 무슨짓을 한걸까?

  • tory_5 2021.02.16 05:26
    글을 굉장히 잘 썼다.... 오랜만에 글 다운 글 보고 가네.
    좋은 글 올려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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