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정원
P.46

나는 여자들이 그렇게나 많이 남자들에게 당했으면서도 여전히 남자에게 환상을 품는 것에 정말이지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내가 선택한 이 운명 말고, 다른 운명의 남자가 어딘가 꼭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여자들의 우매함은 정말 질색이다. 남자는 한 종이다. 전혀 다른 남자란 종족은 이 지구상에 없다.





P.53

남자는 여자의 등을 밟고 일어서는 일에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비열한 존재다





P.62

인간은 간사한 동물이어서 처음에는 감지덕지하며 거리 안으로 들어오지만 나중에는 반드시 그 이상을 바라게 되는 법이다. 원숭이는 원숭이일뿐이다. 원숭이에게 사람 대접을 해서는 사람에게도, 원숭이에게도 모두 좋지 않은 결과만 낳는다.





P.86

언론이 즐겨 사용하는 말에 '사회 지도층 인사'라는 것이 있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영 비위가 상한다. 단언하건대, 사회를 어지럽히는 인사는 있을지언정 사회를 지도하는 인사는 없다. 대단찮은 학식이나, 상업주의 언론에 이름을 팔은 속된 명성으로 자신을 지도층 인사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나는 가장 혐오한다.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난다.


그 누구도 어떤 다른 사람을 지도할 수 없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방식대로 살뿐이다. 선각자는 있어도 지도자는 없는 것이다. 자신을 내던져 새로운 것을 깨우치는 일은 존중받을 수 있으나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은 채 남을 지도하려 드는 일은 조롱받아 마땅하다.





P.88

욕설은, 하는 사람은 단지 입버릇일지 몰라도 듣는 사람은 매번 날카로운 비수에 찔리는 기분일 것이다. 남자라 해서 여자에게 아무 구속 없이 '썅년'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별로 길지 않은 상담을 끝내고 노트에 이렇게 적는다.


'욕설과 일상 언어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만 보아도 남자들은 미개인이다. 그들은 여태도 동물에서의 진화과정을 끝내지 못한, 아직 많은 부분 수성이 남아 있는 야만인이다.'





P.109

남자가, 이미 검은 발톱을 드러낸 남자가 '뜻밖에' 회개하는 경우는 결코 많지 않다. 아니, 절대 없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남자가 모든 것을 잃었을 때다. 모든 것을 다 잃고 나면 가증스럽게도 다시 여자 마음을 얻어 기대보려는 것이 남자들이란 족속이다.

검은 발톱은 부러진 것이지 사라진 것이 아니다. 게다가 발톱은 다시 자란다.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특히 남자는 여자에 대해 반성할 줄 모른다. 알고 있더라도 실천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는 것이 남자다.





P.134

쓰레기 같은 것들.

나는 자동차 핸들에 손을 얹으며 세상의 쓰레기 같은 남자들을 향해서 한마디 내뱉는다. 언제나 중요한 시기에 일을 그르치게 하는 존재들이 바로 남자다. 남자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다 해야한다고 믿는다. 얼마나 가소로운가.


멍청한 것들.

여자 따위가 운전하는 차에 추월당하다니, 절대 용인할 수 없다며 기를 쓰고 내 차 옆구리로 밀고 들어오는 한 사내의 회색 승용차를 향해서 나는 또 경멸을 퍼붓는다.


발정 난 짐승들.

신호를 기다리는 사이 옆자리 여자의 가슴을 툭 치는 중년 사내의 희고 살찐 손, 번들거리는 얼굴. 나는 거의 구역질의 지경에 이르고 만다. 나는 언제나 진화되지 않은 미개인 사내들 때문에 욕지기를 느낀다. 그들만 아니면 세상은 얼마나 밝고 부드러우며, 또한 멋진가.





P.232

남자들이란 정말 피곤한 존재다.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는 인간의 필수적인 기능조차 습득하지 못한 미개인들, 큰일을 도모하다 결국은 작은 이익에 빠져 일을 그르치는 반란자들, 이것이 바로 남자들이란 존재의 속성이다. 





P.265-269

한 집단의 장이 천편일률적으로 남자에게만 맡겨지는 지금의 제도를 고쳐 여성들이 모두 그 자리를 장악할 수 있다면, 만약 그렇다면 세상을 한결 고요하고 아늑하게 돌아갈 것이다.


(중략)


그녀들은 폭탄주를 마시며 밀실에서 음모를 꾸미는 대신, 분위기 좋은 찻집에서 향기로운 차를 마시며 조직의 미래를 논할 것이므로 약육강식의 논리를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오직 밀어내기와 뒤집어씌우기에만 골몰해온 남성 무사드르이 활극은 더 이상 보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중략)


바뀌어야 한다. 대안은 하나뿐이다. 하늘의 절반을 차지하고 땅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또 하나의 성, 여성이 나서야 한다. 그리하여 굳어진 이 세상 것들을 부드럽게 풀어줘야 한다. 목숨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남성들에게 모성의 위대함을 가르쳐야 한다. 남성들이 강탈해간 권력을 되찾아와야 한다. 지배할줄밖에 모르는 사람들에게 지배당하는 수모와 체념의 안락함도 가르쳐 주어야 한다. 경험은 아무리 많아도 지나침이 없으므로.


(중략)


조금만, 아주 조금만 깨어나면 되는 것이다. 어려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갖춰야 할 사전 지식이나 배움도 필요 없다. 단지 아주 조금만 이 세상을 바로 보면 된다. 남자가 여자의 위에 있다는 논리가 허위사실의 유포였다는 것만 알아도 반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P.276

"난 여자들이 연약함을 내세워 남자들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것을 혐오해요. 남자들이 연약한 여자들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도 그런 작태를 부추기는 꼴이지요. 여자라는 존재는 약하다고 믿고 싶은 게 남자들 희망이거든요. 그래야 여자들 위에 군림할 수 있으니까요. 어쩌면 그것도 하나의 집단 최면일지도 몰라요. 남자들은 강한 여자들에 대해 공포를 느끼고 있어요. 여자라는 종족이 사실은 남자보다 우월한데 거기다 힘까지 강해지면 절대로 휘어잡을 수 없다는 것을요. 그래서 끊임없이 연약한 여자가 아름답다고 외치지요. 그 말은 곧, 여자들이여. 제발 힘을 버려달라, 라는 주문에 다른 표현이라고요.




P.358 작가의 말 중에서

나는 가능하면 이 소설이 여성소설의 범주에서만 읽히지 않고 세상의 온갖 불합리와 유형무형의 폭력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에게 합께 읽히기를 감히 소망한다. 그것이 삶을 대하는 진정한 예의라고 믿는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란 이 긴 제목은 뽈 엘뤼아르의 시 '커브'의 전문이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을 때, 지속되는 삶의 궤도 위에서 온 힘을 다해 커브를 도는 일은 누구에게나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소설이 커브를 결심한 모든 이에게, 잠시라도 힘이 되었길 바란다.


1992년 여름 양귀자
  • tory_1 2024.10.08 23:37
    살까말까 고민했는데 당장 주문해!
  • tory_2 2024.10.09 08:52
    p276 소름 돋는다... 작가님 통찰력 bb
  • tory_4 2024.10.10 12:44
    22
  • tory_3 2024.10.09 18:59
    책 읽을 때 첫번째 구절 처음 본 순간 소름돋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
  • tory_5 2024.10.10 21:07
    양귀자 선생님은 진짜 대단한 사람이야 이 책 읽고나서 너무나 통쾌했던 기억이 있어
  • tory_6 2024.10.10 21:53
    진짜 공감...
  • tory_7 2024.10.11 18:15

    나 이책 정말 재밌게 읽었는데 토리글 보니까 나도 좋았던 구절은 기록을 해놔야할까 싶네. 오랜만에 다시 읽고 싶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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