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정원

'총을 쏘면 안 된다'는 정치사회적 윤리를 '총만 안 쏘면 된다'로 왜곡한 잔인한 방식이었다.

<오월의 사회과학>, 최정운, 123p


5월 18일 새벽 0시 20분, 저녁에 짜장면을 먹고 도서관에서 잠을 자는데 갑자기 공수부대들이 들이닥쳐 두들겨 패서 복통 및 구토 발생

5.18 의료활동 <자료 기록 및 증언>, 광주광역시의사회, 115쪽 에서 재인용


"최초로 본 병원 응급실을 찾아온 환자는 손○○(27세, 남)로 5월 17일 저녁 도서관에서 잠을 자는데 갑자기 공수부대원들이 들이닥쳐 곤봉으로 복부를 가격해 복통과 구토를 호소하며 5월 18일 오전 8시 20분경에 응급실로 내원하였다. 기록에는 "복부좌상(타박상), 2주"라고 적혀있었다."

김현종(당시 전남대병원 외과 레지던트), 『5.18, 10일간의 야전병원』, 53쪽



공수대원들은 서너 명이 1개조가 되어 학생처럼 보이는 청년들을 무조건 쫓아가서 곤봉으로 머리를 때리고 공을 차듯이 가슴과 배를 내질렀다. 시위 군중은 불과 십여 분도 못되어 산산이 흩어져갔다. 공수대원들은 골목마다 뛰어다니면서 주변에 숨어 있는 청년들을 두들겨 패고 나서 손목을 뒤로 하여 포승으로 묶고는 차에 던져올렸다. 차 위에서는 무전병이 기다리고 있다가 체포되어 올라온 즉시 발가벗기고 굴비 엮듯 엎드리게 하고는 계속 난타했다. 거리에는 일시에 살기가 맴돌았고 골목마다 비명과 흐느낌이 요란했다. 어떤 경우는 터미널 골목의 막다른 골목까지 달아난 학생이 드디어 잡히게 되자 자지러지게 무릎을 꿇으며 살려달라고 연신 빌었다. 대문에 나와 내려다보던 할아버지가 너무도 애처로워 몸으로 가리고 봐달라고 사정하자, 공수대원은 "비켜 이 새끼!" 하면서 할아버지를 곤봉으로 내리쳤다. 할아버지는 피를 뒤집어쓰며 고꾸라졌고 쫓겼던 학생은 돌을 집어 들었으나 공수대원은 가차없이 곤봉으로 후려친 뒤에 대검으로 등을 쑤시고는 다리를 잡아 질질 끌고 길거리로 나갔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초판)』, 1985, 49쪽


젊은 여성이나 양복이라도 반반히 입은 청년들에 대한 계엄군의 폭행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젊은 청년이 계엄군에 발각되면 일단 워커발로 짓이기고 몽둥이 찜질을 한다. 생명의 위험을 느낀 청년이 달아나면 끝까지 추적, 그 청년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더 이상 운신을 못할 때까지 갖은 폭력을 행사했다. 내가 목격한 장면 중 한 청년은 금남로 중간에서 계엄군에게 붙들려 얻어맞다 옆 골목으로 도주해 무등고시학원으로 도피했는데, 뒤쫓던 계엄군은 고시학원 계단 위를 무장한 채 따라가기에는 거추장스러워지자 소총에 장착된 대검을 뽑아 청년의 등 뒤에 던졌다. 이어 합류한 한 무리의 병력은 학원 안에서 공부하고 있던 수험생들을 무자비하게 내갈겼다.

김충근(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금남로 아리랑, 5.18 특파원, 212


일요일이었다. 날씨는 아주 화창했다. 평균기온 16.3도로 아침을 약간 쌀쌀했지만 낮의 최고 기온은 25.1도까지 올라간 아주 쾌청한 날씨였다.
세째 일요일이어서 상가에는 문을 닫고 쉬는 점포가 눈에 띄게 많았다.

한달이면 대개 첫째와 세째 일요일은 쉬는 날로 정하는 점포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농촌에는 바야흐로 모내기철을 앞두고 그 준비에 온 힘을 쏟고 있어서 집앞과 논밭에는 활기가 넘쳐 흘렀다.
그런 일요일이었다.
광주직할시 북구 북동 180번지 앞 큰길. 금남로의 연장이어서 그냥 금남로길이라고 불리어지는 길이다.
……얼룩무늬 군복에 머리에는 방석망이 달린 헬멧을 쓰고 손에는 방패와 방망이를 든 1개중대 가량의 공수부대 군인들.……대결이 이 횡단보도 위에 도착할 무렵 내려진 명령이었다. 그러자 군인들은 횡당보도선에 맞추어 일제히 멈추어서서 대오를 가다듬고 있었다.
유동 3거리에서 450m쯤 떨어진 횡단보도. 여느 횡단보도와 마찬가지로 하얗게 칠해져 있었다. 

이 횡단 보도는 북동 180번지와 누문동 62번지를 연결하고 광주제일고등학교로 들어가는 길로 이어져 있다.
짧고 숨막히는 시간이 흘렀다. 시계의 짧은 바늘이 4자 위에 서고 긴 바늘이 12자 위에 이르렀다.
바로 4시 정각이었다.
바로 이때였다. 대열을 따라온 초록색 1.5톤급 차량 위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갑자기 찢어지는 듯한 금속성으로 위압적인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거리에 나와있는 시민 여러분, 빨리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빨리 돌아가십시오."
……스피커에서 귀가를 종용하는 방송이 나온 지 1분이 지났을까. 이번에는 짧은 순간을 두고 엄청난 명령이 뒤따라 튀어나왔다.
시민들에게 한 것이 아니라 지휘관이 부하들에게 내린 명령이었다.
"거리에 나와있는 사람은 전원 체포하라."
딱 한마디. 이 명령 이외 어떤 세세한 행동지침이 나올 법한테 그렇지도 않았다. 아무런 군더더기도 없었다.
……
이 명령이 떨어지자 현장은 순식간에 수라장으로 돌변해버렸다.……시위했던 학생들만 잡는 것이 아니라 젊다고 보여지는 사람이면 보는대로 두들겨 패고 잡아 끌었다. 순간적인 일이었다. 비명소리와 고함소리가 사방에서 터져나왔다.
……
'저놈 잡아라' '저기 간다'는 소리와 동시에 '아이구' '억' 소리가 터져 나와 거리는 삽시간에 지옥으로 변해버렸다.
횡단보도 바로 옆, 북동 276번지 3층 건물 2층에 있는 동아일보 광주지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2명의 공수부대원이 고양이가 쥐를 잡으려는 듯한 자세로 뛰어 올라왔다.
두 사람 모두 대검이 꽂혀 있는 M16소총을 앞으로 내밀고 서슬이 퍼렇게 되어 있었다. 마치 총검술시범을 보이는 자세처럼 착검한 M16소총을 앞으로 겨누고 있었다. 곧 아무에게라도 방아쇠를 당겨 버릴 자세, 아니면 금방 찔러 버릴 듯한 그러한 모습이었다.
……
마침 일요일인데도 출근한 정은철 총무는 바깥의 시끌벌적한 사태와는 관계없이 자기 책상에 앉아 무엇인가 열심히 쓰고 있었다.
그는 '시위를 한일도 없음은 물론 구경조차 하지 않았던 터라 무슨 상관이 있으랴'는 듯 태연하게 자기 일을 부지런히 하고 있을뿐이었다.
그런데 두 군인은 다짜고짜로 정 총무의 뒷 덜미를 낚아챘다. 정씨는 의자와 함께 뒤로 벌렁 넘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두 군인은 정씨를 마구 짓밟고 개머리판으로 짓 이기는 것이었다. 곧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큰 일이었다.
……
정 총무는 얼마나 맞고 밟혔는지 반항하는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두 군인은 사무실 바닥에서 기진맥진해 찍 소리도 못하는 정 총무의 두발을 양쪽에서 하나씩 붙잡고 끌고 내려갔다. 바닥에 끌린 채였다. 마치 죽어있는 짐승을 끌고 내려가는 것 같았다. 2층 계단을 내려갈 때도 그대로 끌고 내려갔다.
……

이 날 그는 자기가 맡은 구역의 수금실적이 나빠 하루 전날 지사장으로부터 질책을 받고 일요일인데도 출근했다가 당한 것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담당구역 수금을 하기 위해 출근한 배달학생 박준하군(광주공고 1년)도 수없이 맞고 짓밟혔다. 그리고나서 끌려나가다 계단에서 실신해버렸다. 그러자 비로소 그들은 그대로 팽개쳐 두고 내려가 버렸다.
……

동아일보 광주지사 바로 앞쪽에는 2대의 트럭이 유동 3거리 쪽을 향해 정차해 있었다. 그 차량에는 길거리와 건물 안팎에서 붙잡혀 끌려온 사람들이 가득가득 실리고 있었다. 얼마나 맞고 밟혔는지 머리와 코, 입에서 피를 토해 내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그들의 하얀 옷자락은 피에 젖어 엉망으로 되어있었다.

어떤 사람은 기진한 듯 눈만 껌벅껌벅하는 모습도 보였다.
한 사람이 붙잡혀왔다. 그의 머리나 코에서는 피가 줄줄 쏟아져내렸다. 웃옷은 갈기갈기 찢겨진 채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끌고 온 군인이 대기 중인 군인에게 인계하면 또 한 차례 군화발이 날아오고 몽둥이 세례가 쏟아졌다. 그리고 짐짝 실리듯 트럭 위로 이끌려 올라갔다. 그러면 거기에 있는 또 다른 군인이 '이 새끼 머리 숙여'라며 군화발로 머리와 등을 짓밟는다. 숨소리 조차 들리지 않아야 끝이 난다.
……
그때 마침 택시 한대가 지나가려다가 이들에게 붙잡혔다.
감색 양복에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젊은 남자와 색동 저고리에 빨간 치마를 입은 예쁜 새색시가 차에서 끌려 나왔다. 한 눈으로 보아도 신혼부부임에 틀림 없었다

.……

이 길은 시내 중심가에서 광주공항이나 고속버스 터미널 또는 광주역으로 빠져나가는 길목이다. 그래서 이 신혼부부는 공항이나 역쪽으로 가고 있는 듯했다.
그들 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택시에서 끌려나오자마자 신랑은 무자비한 몽둥이와 장작개비 그리고 군화발 세례를 받았다. 이유도 없었다.
순식간에 일이었는데 신랑은 '아이구, 눈이야'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눈을 붙잡고 땅바닥으로 뒹굴고 있는 것 이 아닌가
……
신부도 군화발로 채였는지 한복은 엉망이 된 채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
"사람 살려!"
신부는 자신의 몰골은 돌아보지도 않고 땅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신랑을 붙잡고 엉엉 울며 절망적으로 울부짖었다.
"이 쌍년"
군인들은 또 다시 신부를 걷어차며 욕지거리를 하더니 '빨리 꺼져'라고 소리를 질렀다.

김영택, 현장기자가 쓴 10일간의 취재수첩, 1988, 사계절, 11~22



공수부대가 진입해 시민들을 무차별 구타하는 처음 장면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공수부대가 처음으로 구타나 마구잡이식 진압이 시작되는 곳이 계림종지역이었다고 생각되나 아마 거의 같은 시각에 수창국민학교 앞에서도 공수부대원들이 나타났다. 시간은 대략 18일 오후 3시경으로 짐작하고 있는데 병원 앞에서 수창국교 부근까지에서 학생들과 공수부대가 처음에는 대치하고 있었다. 공수부대에는 군인 짚차가 한대 있었고 V자형으로 15명 정도가 도열해 있는 가운데 중간지휘자가 대열의 중간 뒤쪽에 서 있었다. 얼마 후 이 지휘자는 무언가 명령을 내렸는데 이때부터 공수부대원들이 학생들과 시민들을 쫓아가 닥치는 대로 구타를 가하기 시작했다.
당시 공수부대원들은 쑥색 얼룩무늬 옷을 입고 머리에는 한쪽이 균형이 맞지 않는 공수부대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이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얼굴은 검정색이 도는 구릿빛이면서도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고 표정 자체가 꼭 술먹고 화난 사람처럼 심상치가 않았다. 아무리 보아도 정상적인 얼굴표정은 아니었으며 수창국교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다른지역에서도 동시에 무차별 가격이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때 별 생각 없이 구경하던 사람들이 갑작스레 구타를 시작하자 도망가지 못하고 심하게 맞은 경우가 많았다.
이때부터 병원으로 부상자와 환자들이 몰려오기 시작해 치료와 함께 사실은 병원 뒤쪽 담을 통해 피신시키는 일을 했었다. 부상환자는 대부분 상처가 오른쪽 머리부위에 많았는데 오른손잡이 공수부대원이 도망가는 사람을 때렸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도망가는 사람은 대부분 뒤쪽에서 때린 상처가 많았으며 곤봉으로 맞아 3~5cm 정도가 찢어져 있어 꿰매고 또 병원 앞으로 보낼 수 없어 담을 넘어서 보내곤 했다. 대부분 부상자는 가명으로 치료했으며 13~14명 정도의 부상자를 그날 치료한 것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는 신혼부부로 당시 공용터미널 중간부분에서 택시를 타고 가다가 공수부대원들이 택시를 세우고 이 부부를 끌어내려 무작정 곤봉 등으로 때렸다는 것이다. 남편은 아래턱이 빠진 상태로 심한 부상을 입었으면 부부가 함께 머리 등에도 상처가 났었다. 나중에 이 부부가 병원에 다시 온 적이 있었는데 남자는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것 같았다.
당시 공수부대원들이 학생이나 구경하던 사람을 때릴 때는 3~4명이 한 사람을 거의 반 죽음 상태까지 집중적으로 구타하는 수법을 써서 부상자들은 두피가 갈라지고 그 자리에 피가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 들 부부도 택시에서 신혼부분답게 카메라를 들고 있었는데 공수부대원 여러명이 달려들어 집중구타를 해 남자는 거의 반죽음 상태였고 여자는 옷이 다 찢어져 입을 수가 없었다. 병원에서 아주머니들이 옷을 입혀서 산수동쪽으로 데려다 주었는데 정말 딱한 일이었다.

심재영(심산부인과의원장. 당시 심산부인과의원장)5.18 의료활동 <자료 기록 및 증언>, 광주광역시의사회, 206~207


젊은 여성들의 경우 계엄군은 다짜고짜 블라우스 등을 찢어 걷어내거나 대검으로 바지와 치맛자락을 찢어 여자를 거의 나체 상태로 만든 다음 폭행을 가했는데, 방망이나 구둣발길이 날아가는 신체의 부위가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곳이었다…. 젊은 여자, 그것도 옷맵시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고 예쁘장한 여자일수록 가해지는 폭력은 더 심했고 옷을 찢어발긴다는지 가격하는 신체부위가 여체의 특정 부위들에 집중되었을 때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되겠는가? 백주겁탈, 폭력난행, 성도착적 무력진압 등의 표현들이 얼핏 떠올랐으나 그것 역시 광주 상황을 전하기엔 적절치 못하였다.

김충근(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금남로 아리랑, 5.18 특파원, 212~214


공수 놈들이 여고생을 붙잡고 대검으로 교복 상의를 찢으면서 희롱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60살이 넘어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아이고, 내 새끼를 왜들 이러요?' 하면서 만류하자 공수놈들은 '이 씨팔 년은 뭐냐? 너도 죽고 싶어?' 하면서 군화발로 할머니와 배와 다리를 걷어차 할머니가 쓰러지자 다리와 얼굴을 군화발로 뭉개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여학생의 교복 상의를 대검으로 찢고 여학생의 유방을 칼로 그어 버렸다. 여학생의 가슴에서는 선혈이 가슴 아래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박남선,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121~122


11대 군용트럭의 대열 맨 마지막 차량 위에서는 22~23세 가량의 처녀인 듯한 여성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수모를 당하고 있었다… 하얀색 투피스 스타일의 윗옷은 피투성이가 된 데다 갈기갈기 찢겨진 채 옷을 입었다기보다는 젖가슴이 보일 정도로 걸처져 있었고 아랫도리는 완전히 벗겨진 채였다. 아가씨는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고 있었다. 처녀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치부를 가리기위해 두 다리를 소아마비 환자처럼 구부리고 있었다. 발 아래에는 그녀가 입었던 팬티며 스커트가 피로 얼룩진 채 함부로 버려져 있었다…. 그녀는 차량 옆에서 군홧발로 채이고 진압봉으로 두들겨 맞아 쓰러져 있었다. 그러자 군인들이 '이년 봐라'하면서 옷을 붙잡고 일으키다 옷이 찢겨져 버렸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군인들이 다시 '쌍년 올라가'라고 욕지거리를 하며 군홧발로 걷어차자 차 위로 올라갔는데 또 다시 발길질로 군인들이 그녀를 맞았던 것이다. 윗옷마저 거의 찢겨져 완전히 나체 상태로 바뀌기 직전이었다.

김영택(동아일보 기자), 실록 5.18 광주민중항쟁, 창작시대사, 1996, 40쪽



이때 한 40대가 남자가 하얀 가운을 들고 나와 이 아가씨에게 던져 주려다 군인들에게 붙잡혔다. 공수부대원들은 이 남자에게도 군홧발과 몽둥이 세례를 여지없이 가했다. 그는 바로 옆에 있는 서석병원 사무장이었다. 병원장 김상수(45) 박사로부터 가운과 팬티를 구해다 주라는 지시를 받고 병원 간호사의 것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16시 45분쯤이었다.
이 같은 광경은 행인을 물론 이 건물 저 건물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 보고 있었다. 시민들은 살기등등한 공수부대원들의 행패를 이미 겪었거나 눈으로 직접 목격했던 터라 감히 나와서 만류하거나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공수부대원들의 만행에 대한 탄식은 자신도 모르게 이입 저입에서 튀어나왔다.
...한마디, 두마디가 모여 군인들의 귀에도 들렸음인지 그들은 병원 사무장이 던져 주려 했던 가운을 홱 던지며 "입어"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녀를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 해 비틀거리며 얼굴을 감싼 채 군인들의 무리 속에서 빠져 나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김영택(동아일보 기자), 실록 5.18 광주민중항쟁, 창작시대사, 1996, 40쪽


1980. 5. 18. 조선대학교 의과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민오 씨는 광주일고에서 있었던 동문 체육대회에 참여했다가 주변에서 쫓아온 공수부대원들을 피해 광주일고 교장관사까지 도망쳤다. 하지만 교장관사의 안방까지 추격해 온 공수부대원들에 의해 구타당한 뒤 광주 서부경찰서를 거쳐 상무대로 연행됐다. 5. 19. 밤 상무대 영창에서 심각한 복통과 구토를 호소한 그는 이날 24:00경 광주국군 통합병원으로 옮겨졌다. 후송 당시 구타 후유증으로 췌장 및 비장 파열, 복막염 등이 발생하여 위험한 상태였다.

12․12, 5․17, 5․18사건 조사결과보고서, 70~771



김경철 씨는 귀가 들리지 않고 말을 할 수 없는 장애인이었다. 갓 백일이 지난 딸이 있는 평범한 가장이었던 그는 친구들과 점심식사 뒤 집으로 돌아오던 중 공수부대의 눈에 띄어 무차별 구타당했다. 부상당한 그는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으나 19일 03:00에 사망했다. 검찰 검시조서에는 후두부 찰과상 및 열상, 뇌안상검부열상, 우측 상지전박부 타박상, 좌견갑부 관절부 타박상, 진경골부, 둔부 및 대퇴부 타박상 등이 사인이며, 사망진단서에는 후두부타박상에 의한 뇌출혈이 직접사인었다. 그의 시신은 군 당국에 의해 광주통합병원 영안실로 옮긴 후 상무대 내 101사격장에 매장됐다가 가족들에 의해 망월동에 안장했다.

12.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70쪽


어느 할아버지는 '저럴 수가 있느냐. 나는 일제 때에도 무서운 순사들도 많이 보고, 6.25 때 공산당도 겪었지만 저렇게 잔인하게 죽이는 놈들은 처음 보았다. 학생들이 무슨 죄가 있기에 저러는가. 죄가 있다고 해도 저럴 수 없다. 저놈들은 국군이 아니라 사람의 탈을 쓴 악귀들이야' 하면서 통곡했다. 어느 중년의 사내는 '나는 월남전도 참전해서 베트콩도 죽여봤지만, 저런 식으로 죽일 바엔 그냥 총으로 쏴 죽이지. 저놈들을 죽여버려야 해' 하면서 오열을 터뜨렸다. 온 거리는 피의 강, 울음의 바다가 되었다.

전남사회운동협의회 편, 황석영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51


쓰고 있는 베레모를 벗고 방탄 헬멧으로 바꾸어쓰라는 이 지시는 곧 차량에서 하차를 의미하고 어디선가 시위대와 맞닥뜨려 시위진압을 의미한다는 걸 사전교육을 통해 저희는 잘 알았답니다. 차량은 다시 양복 복개상사에서 좌회전으로 돌려서 전차량 금남로에 단숨에 달려가 관광호텔 앞에 정차를 하니 여기저기 돌멩이가 어지럽게 길바닥에 나뒹굴고 있더군요. 차량에서 하차는 하지 않고 기다리는데 시위대는 전부 도망갔으니 전 병력이 하차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시간이 흐른뒤(2~4분)"하차"하는 명령이 하달되더군요. 이 명령이 곧 우리 귀에는 "무자비하게 젋은 사내는 두들겨패라"는 지시로 들렸읍니다.……차량에서 하차하니 이미 다 시위대는 뿔뿔이 도망치고 누군가에 이 증오심을 풀어야겠는데 시위대는 없고 무두다 그 근처 관광호텔, 다방, 이발소 등등 건물을 수색하기 시작했답니다. 그때 나는 관광호텔 뒤에 있는 미도장인가 하는 여관을 7~8명이서 수색하기 위해 갔더니 앞에 철문이 닫혀 있더군요. 아무리 문을 두들겨도 안 열어주어 담을 타고 다른 사병이 넘어 들어가서 철문을 여니 몇몇 종업원이 우르르 나오더니 우리 집에는 아무도 없다고 하더군요.
차라리 뒷문을 통해 피했으면 좋았을 텐데, "이 개새끼들이 겁대가리 없네"하면서 태권도 동작 발차기로 2단 뛰어차기로 일부는 때리고 일부는 진압봉으로 구타를 시작했읍니다. 이 진압봉은 서두에 설명했듯이 너무나 단단하고 무게가 있어서 조금만 힘을 가해서 때리면 손목이나 팔목으로 막으면 팔이 부러지는 것이었읍니다. 4~5명의 종업원이 불과 2~3분 사이 하얀 와이셔츠에 나비 넥타이는 간 곳이 없이 시멘트 바닥 위에 나뒹구든 것이었읍니다. 다시 일으켜세워서 4명을 전체 벽에 뒤로 기대게 하자 마침 지역대장 소령이 오더군요. 구타 에는 장·사병이 따로 없었읍니다. 그는 무릎을 꿇게 한 다음 신고 있는 군화발로 있는 힘을 다해서 얼굴을 한 번씩 차는 것이었읍니다.
모진 것이 사람의 목숨이었읍니다. 얼굴은 뭉개지고 피는 쏟아지고 군화발의 충격으로 인해서 뒷머리를 시멘트 벽에 그토록 강하게 부딪쳤지만 쓰러진 사람은 없더군요. 다만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얼굴로 변했지요. 한편 함께 수색하던 일부 병력 2~3명은 각 객실을 수색하여 젊은 사람은 무조건 밖으로 집합시키고 있었읍니다. 10여 명 이상의 20대 30대 젊은 사람들이 공포의 표정으로 2열종대로 집합하더군요. 그중 30대 중반의 사나이는 신혼여행 왔다고 사정을 하더군요. 저희하고는 대화가 필요없었읍니다. 무조건 무자비한 구타요, 연행 이외의 방법은 통하지가 않았읍니다. 신부가 나와서 사정사정하더군요. 눈물도 피도 없었읍니다. 일단 붙잡힌 시민들은 일차례 구타가 시작되었읍니다. 왜냐하면 도망을 못 가게 한다는 이유요, 기를 죽인다는 이유였읍니다. 다음 차례는 무조건 옷을 벗기고 팬티만 입히는 것이었읍니다. 그리고 차고 있던 본인의 혁대로 뒤로 손을 묶고 묶인 손으로 자신의 벗은 옷을 듣고 저희가 타고왔던 트럭 옆으로 끌고가서 다른 연행자와 함께 금남로 도로 한가운데 30~40명씩 집합 후 뒤로취침, 앞으로취침, 좌로굴러, 우로굴러 등 혹심하게 기를 죽이고 트럭 뒤에 2열종대로 집합시키는 것이었읍니다. 그후 차량에 탑승하면 손은 뒤로 묶인 상태에서, 보통 성인도 타기 힘들 정도로 높은 차량을 타는 것이었읍니다. 뒤에서 다른 연행자가 머리를 들어서 밀어 올리고 타는 연행자는 죽도록 올라타는 것입니다. 생과 사의 갈림길이요, 또한 몽둥이 세례 때문에 인간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모를 정도로 무섭더구요. 차량에 탑승하면 2~3명의 통신병이 기다리고 있다가 "고개숙여" "고개숙여" 지시합니다. 왜냐하면 고개를 들고 서로 상대방의 얼굴을 보면 용기도 생기고 특전사 요원이 2~3명이라는 것을 알면 집단으로 대항하여 도주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이라도 고개를 들거나 옆사람을 보면 위에서 기다리는 요원이 또한 몽둥이로 등을 사정없이 내리친답니다. 그리고 차량으로 조선대학교 종합운동장으로 이동시킵니다. 고통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차량이 연병장에 클랙슨을 울리면서 도착하면, 잔류하고 있던 행정병이나 취사병 경계 대기병 등이 진압봉을 들고 모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차량에서 하차시켜 다시 줄을 세워 다시 기합과 구타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 글로 적을 수 없도록 구타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체육관 건물에 수용시킵니다. 앞뒤 문에는 4~5명씩 초병을 세우고, 안에서 4~5명이 구타를 또 한답니다. 그리고 잠시 대기하다가 상무대 31사단으로 보내집니다. 시위를 하였든 하지 않았든지 젊은 사람이라는 죄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한번 붙들리면 3~4차례 극심한 구타와 기합 등으로 인간의 한계를 지나버릴 정도로,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고통이 따르는 것입니다.


광주사태에서 나는 무엇을 했나 - 광주사태 당시 투입됐던 어느 계엄군의 수기, 윤재걸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1987, 실천문학사, 21쪽, 35~37쪽


우리 부대가 처음 광주에 도착한 19일 오전은 전날의 잔혹한 진압 때문인지 학생들의 시위가 있기는 했지만 간혹 몇백 명쯤 모여 구호를 외치다 군인들이 쫓아가면 도망할 뿐 그렇게 격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오후부터 사정은 달라졌다. 학생들의 시위와 시민들의 따가운 눈총에 화가 난 군인들은 난폭해지기 시작하였고, 이제는 시장이나 거리 어디서고 젊은이들은 무조건 잡아서 두들겨 패패고 옷을 벗기고 진압봉과 총검으로 때리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천여 명의 공수 요원들은 흩어져 시위하던 학생들이 건물이나 주택으로 도망을 가면 쫓아 들어가 거기 있는 젊은 사람들은 다 데모대로 간주하고 무자비하게 밟고 때렸다. 그러다보니 생업의 현장에서 혹은 우연히 길을 가다가 애꿎게 잡혀 짓밟힌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내가 속한 중대 병사들이 한 여관에 들어가 한 젊은이를 찾아내 얼마나 심하게 다루었는지, 얼굴과 머리에 피가 낭자하고 공포에 질린 그 사람이 살려달라고 애처롭게 빌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런 사정은 남자뿐 아니라 여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군인들에게 잡혀 온 사람들은 옷을 벗기고 군화에 채이며 머리를 땅에 박고 줄지어 앉아 있다가는 군용차량에 실려 공수요원들이 주둔하고 있는 전남대나 조선대로 온갖 학대를 다 받아가며 연행되어야 했다. 시장이나 길가에 서 있던 그곳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처음에는 용감히 항의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사태가 도를 넘는 순간부터는 감히 대드는 사람도 없고 다들 눈치만 보며 숨죽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무자비한 진압을 통해 시내를 평정하고 돌아오던 지휘관들과 공수부대 요원들의 자신만만한 모습도 기억에 남는다.
한 마디로 ‘개새끼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감히 까분다’는 식이었다. 19일인지 20일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시내를 돌다 돌아와 보니 조선대 교정에는 군인들에게 잡혀 온 수백 명의 학생들이 있었고, 그 넓은 운동장에서 수십 명의 군인들에게 사정없이 맞고 짓밟히고 있었다. 그들은 군인들이 시키는 대로 시궁창을 기어야 했고, 운동장선착순을 수십 번씩 해야 했고, 그중에서도 늦는 이들은 군홧발과 진압봉에 채이고 맞는 수모를 당하고 있었다. 또 20일인가 그 다음 날인가도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헌병대가 쓰고 있던 체육관 건물에서 두 명의 젊은이가 하얗게 죽어 넘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마 차량에 실려 오던 도중이나 아니면 그런 와중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일 것이다. 매맞고 부상당한 학생들을 군용 트럭으로 수송하면서 그 속에 몇 발씩 가스탄을 터뜨린 군인들도 있었다 하니, 그런 와중에 죽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 그런 처참한 상황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20년만의 고백 - 한 특전사 병사가 겪은 광주, 1999년 당대비평 - 20세기 야만과 결별하기 위하여, 207~208


공수부대는 이날(19일) 화염방사기까지 시위진압에 사용한다. 화염방사기는 살상용 무기다. 이날 시위대에 대한 위협용으로 등장한 화염방사기는 그 뒤 21일, 전남대 앞과 시청 앞에서 실제 진압용으로 사용된다.(212쪽)
이 시간(20일 오후 2시 20분쯤) 서방 삼거리에서는 공수부대의 화염방사기가 불을 뿜어 시위대 선두에 섰던 시민들이 까맣게 그을려 쓰러지는 장면이 목격되며...(255쪽)
3공수특전여단의 진압은 곤봉세례와 최루탄 사용에 그치지 않는다. 화염방사기까지 시민·학생들의 시위진압에 동원된다. (88년 청문회 과정에서 당시 지휘관들은 화염방사기를 진압에 사용한 사실은 시인했으나 물감을 넣어 사용했을 뿐 살상용 화염방사기 사용은 없었다고 부인한다.) 방위병 신분으로 시위에 참여했다 화염방사기 공격을 받은 최병옥 씨(당시 21세)는 간신히 화염을 피하긴 했지만 고열로 얼굴이 익는 피해를 입는다.

"차를 타고 가던 중 공수부대의 공격을 받자 인근 주택 화장실로 피신했다. 이미 3명이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곳까지 쫓아온 공수가 갑자기 화장실 창문으로 화염방사기를 대고 불을 뿜어냈다. 순간 숨이 꽉 막혀 뛰쳐나가 그 집 안방 장롱 속에 숨었으나 이내 붙잡히고 말았다. 끌려간 다음 날부터 얼굴은 껍질이 벗겨지고 진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화염방사기의 등장은 곧 공수부대의 진압이 이성을 잃었음을 의미하며(...)(302 ~ 303쪽)
正史 5·18, 광주매일 正史 5·18 특별취재반, 1995



이윽고 (20일) 오후에는 대규모로 시위가 전개되었고 2시 30분경 서방삼거리에서 공수부대는 화염방사기를 쏘아 여러 명의 시민들이 그 자리에서 타죽었다.

『오월의 사회과학』, 최정운, 1999, 137쪽


나는 오른쪽으로 도청 앞 광장, 왼쪽으로는 금남로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건물의 3층에 서 있었다. 하기식을 알리는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금남로를 메운 시위군중들도 주섬주섬 기립자세를 취했다. 바로 그 때 시위대 맨 앞쪽 사람들이 등 뒤쪽으로 피를 뿜으며 길바닥에 꼬꾸라졌다. 그런 다음 귀를 찢는 총성들이 들렸다. 눈을 오른쪽으로 돌렸을 때 도청 앞 광장에 정렬해 있던 군인들은 맨 앞열이 무릎 쏴, 다음 열이 서서쏴 자세로 총격을 가하고 있었다. 그런 다음 두 열의 총격이 끝나면 무릎쏴 자세의 대열이 후미로 빠져 트럭을 타고 빠져나가는 그런 교대형태로 광주의 공식적인 집단 발포명령을 집행되었다. 당시 내가 바로 그 지점에 있지 않았다면 애국가가 집단 발포명령의 신호가 되는 참담한 비극을 증언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총알이 총성보다 빠르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그때 금남로 거리에 가로 걸린 '봉축 부처님 오신 날'이라는 석탄일 축하 아치와 그 밑에서 벌어지고 있는 피비린내 나는 인간 살육이 빚어내는 극과 극 사이의 대조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김충근(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금남로 아리랑, 5.18 특파원리포트, 223



저격수 요원들이 금남로 쪽으로 향해 아스팔트에 '엎드려 쏴' 자세로 저격준비를 갖추고 주요 건물을 장악하기 시작했읍니다. 그 때 전일빌딩 옆 건물에서 젊은 청년이 "이 개새끼들아 나 죽여라"하면서 다리를 절룩거리며 저격수들 바로 앞 20~30m 거리의 도로중앙에 나와서 앉는 것입니다. 저격수들이 몇 발의 사격을 가하자 옆으로 쓰러지는 것입니다. 골목에 있던 시위대가 시체를 가지러 나오자 또 사격이 실시되자 그 시위대 역시 쓰러진 것입니다.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1987, 실천문학사, 51


오후 2시쯤 금남로에서 벽에 몸울 숨기고 잇던 한 시민이 목에 총을 맞고 숨지는 것을 바로 앞에서 목격했습니다. 조준사격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건물 위에서 조준사격을 하는 모양입니다. 오후 2시쯤 움직이는 것은 모두 쏘아 도청 일대에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장재열 (중앙일보 기자), 아직도 굳지 않은 핏자욱, 5.18 특파원 184~185


엄청난 차량행렬이 나타나자 시위대로 오인…… 계속 해서 1번, 3번, 5번, 7번 차량에 대해 정확하게 한 대씩을 빼고 사격을 실시하는 것입니다. 저휘 차량도 앞부분에 로켓탄을 맞아 차량 앞부분은 오간 데 없고 앞쪽에 탑승했던 4~5명이 부상으로 살려달라는 고함소리, 수천 발의 총성, 수류탄 소리 등… "지옥, 그것이 지옥이다"는 표현밖에 없었읍니다… 그때까지 저는 광주를 지키던 시위대와의 격전인 줄 알았습니다. ……야산에서 젊은이 2명을 시위대라고 잡아왔읍니다. 양손을 뒤로 꽁꽁 묶이고 얼굴은 형체를 알 수 없게 구타를 당해서 오는 시위대에게 너도나도 개머리판으로 때리기 시작했읍니다. 그리고 옆에 흐르는 물에 "엎드려"하고 시켰읍니다. 온몸을 파르르 떨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였읍니다. 자신들은 절대 시위대가 아니라고 주장했읍니다. 근처의 모 연탄공장에 다닌다고 했읍니다. 제가 보기에도 그랬읍니다. 하지만 변명이 통하지 않았읍니다....헬기가 계속해서 사상자와 20~30명에 달하는 부상자를 거의 다 나르고 있을 즈음, 뒤쪽으로부터 리어카에 실은 농부 한 사람을 딸이 끌고 왔습니다. 논에서 일을 하다가 총에 맞아 놀라고, 그 딸은 겁에 질려 울지도 않았습니다. 논에서 일을 하다가 무슨 죄가 있다고…….
차량이 거의 다 불에 타버리고 다시 뒤쪽 저희 소속대쪽으로 가니 철군준비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때까지 아까 잡혀왔던 젊은 사내 2명은 엎드려 있었습니다.
그 때 모모 장교가 '◯◯◯ 사살시키라'라고 말하자 '예' 하면서 M16 자물쇠를 풀더니 앞의 젊은이에게 3발을 탕, 탕, 탕 하고 쏘고 다시 뒤의 젊은이에게 3발을 쏘자 파르르 물 속에서 떠는 것입니다. 사람의 목숨이 너무나도 보잘 것 없고 비참했읍니다. 다시 모 하사관은 확인사살을 한다고 죽은 젊은이에게 사격을 가하는 것입니다. 제가 꿈속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1987, 실천문학사, 57


못자리에서 피사리하는 농부에게 총을 쏘아 중상을 입히고 저수지에서 목욕하는 중학교 1학년짜리를 오리 사냥하듯 쏘아죽였으며, (중략) 국민이 나라를 지키라고 세금을 내어 월급 주고 그 세금으로 사준 총으로 적이 아니라 제 국민을, 더구나 어른도 아니고 아이들까지 이토록 잔인무도하게 죽였다. 적진에서도 이럴 수 없는 일이다. 그게 지휘관의 의도가 아니었다면 그 책임자는 자결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지휘관은 없었다. 모두가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들이다. 아니,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 무자비한 살육의 공포로 국민을 누르고 정권을 잡았으므로 처음부터 인간이 아닌 자들이 정권을 잡기 위해서, 그런 인간이 아닌 짓을 했던 것이다.

송기숙 글,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엮음, 『광주민중항쟁사료전집』, 1990, 풀빛, 173


consider the response when General Chun's military dictatorship in South Korea crushed the democracy move-ment in Kwangju in May 1980. Paratroopers "carried out three days of barbarity with the zeal of Nazi storm troopers," an Asia Watch investigative mission reported, "beating, stabbing and mutilating unarmed civilians, including children, young girls, and aged grandmothers." Two thousand people were killed in this rampage, they estimate. The US received two requests for assistance: the citizens committee that had called for democracy requested help in negotiations; General Chun requested the release of 20,000 troops under US command to join the storm troopers. The latter request was honored, and US naval and air units were deployed in a further show of US support.

(1980년 5월 한국에서 군부가 광주 민주화 운동을 진압했을 때 미국정부의 반응을 살펴보자 . '아시아 인권감시단'은 "공수부대가 광주에서 사흘동안 나치 독일 돌격대와 같은 만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어린이, 여성, 할머니 등을 포함한 비무장 시민을 무참히 살육했다." 고 고발했다. 이 단체는 그러한 광란으로 최소 2천여 명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전두환과 시민위원회로부터 동시에 도와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민주주의를 촉구하는 시민위원회는 미국 정부가 전두환의 만행을 견제해 줄 것을 요구했다. 반면 전두환의 요구는 미 8군이 광주 시민 진압을 위한 2만명의 군 병력 이동을 허가해 달라는 것이었다. 전두환의 제안은 미국 정부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고, 미국 정부는 확고한 지지를 과시하기 위해 미 해군과 공군을 배치하기도 했다.)

노엄 촘스키의 저서 507년, 정복은 계속된다(Year 501: The Conquest Continues) 중 99~100p 에서 발췌(1993년)



출처

https://m.blog.naver.com/lycaon_b/220116959256(보고서들)
http://dl.nanet.go.kr/index.do

https://www.dmitory.com/garden/98208782


  • tory_1 2022.05.17 23:09
    삭제된 댓글입니다. (삭제일시: 2022/08/21 16:20:37)
  • tory_2 2022.05.18 01:12
    가슴아파 민주화는 피로 써야한다지만 너무 가혹해
  • tory_3 2022.05.18 01:43
    너무 마음이 찢어져서 읽을수가 없다 ㅜㅜ 하 ㅜㅜㅜ
  • tory_4 2022.05.18 02:56
    삭제된 댓글입니다. (삭제일시: 2023/05/24 06:24:37)
  • tory_5 2022.05.18 06:37
    어떻게 저토록 끔찍하게 굴었던걸까..? 이렇게 많은 기록들이 남겨져있는데도 거짓말하고 자기가 한것아니라며 발빼는 개씨발놈의새끼 그리고 그걸 두둔하는 뒤질놈의악마가 너무 많구나
    아직 42년 밖에 안되었는데도
  • tory_6 2022.05.18 18:03
    삭제된 댓글입니다. (삭제일시: 2022/12/28 17:32:49)
  • tory_7 2022.05.18 21:14
    시민들은 총을 들고도 그것도 사람이라고 눈앞에 두고도 총을 못 쐈는데 공수부대는 어버버하는 시민한테 미친듯이 총쏴댐 사람이 아님
  • tory_8 2022.05.18 21:57

    우리가 뭘 상상하든 그거보다 더 잔혹하더라

  • tory_9 2022.05.18 22:56
    기억할게 올려줘서 고마워.. 잔인하다
  • tory_10 2022.05.20 17:30

    끔찍하다....

  • tory_11 2022.05.21 12:43
    너무 슬픈 5ㆍ18..
  • tory_12 2022.05.22 19:42
    ㅠㅠ.......
  • tory_13 2022.06.01 16:29
    이글만 보는데도 너무 마음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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