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들어 보세요.
노정시 비엘구 어드메에 강이 흐르잖아요. 그 강 옆에 금빛 소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제 집이 거기 있어요.
원래 제 집은 대한민국 거시기였는데 얼마 전에 이사했잖아요.
평생을 거시기에서 살았는데 어쩌다 이사를 했는고 하니 다 사랑 때문이래요.
참 내 일인데 내 일 같지 않아 말이 요상하지요. 이런 일이 처음이라 그러니 이해해 주세요.
어쩌면 첫사랑이랍니다.
취미가 남의 연애 구경질인지라 온갖 놈들 다 보고 온갖 꼬라지를 다 봤는데 걔는 그중에서도 독보적이더라고요.
처음엔 뭐 이딴 게 다 있나 하고 눈살 찌푸릴 정도로 그랬어요. 차마 그때 그 마음을 그대로 적을 수 없는 점 이해해 주어요.
남들이 예쁘다 예쁘다 하는 걸 보니 나도 저 못난 걸 예뻐해주고 싶어서 참고 봤지요.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좀 덜 못나 보이고 그러는 거예요.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그래 웃겨요.
그렇게 계속 계속 보다 보니 어린애가 짠하고, 장하고, 귀여운 구석도 있고.
문득 어느 시인의 시가 생각나더라고요.
아, 당장 제가 연애할 때도 싯구를 떠올리며 울고 웃고 그러지는 않았는데, 그 작고 발칙한 놈팡이 덕에 그러고 앉았었어요.
생긴 것도 못생겼고 하는 말도 하나하나 못났는데도 그쯤 가니까 그 못난 점, 모난 점이 미운 게 아니라 너무 슬프고 안타까운 거예요.
저 어린 것이 저 작고 연약한 것이 조금만 덜 위험하고 덜 외롭고 덜 가난하게 컸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처음 보고 눈살 찌푸렸던 것도 다시 떠올리니 가슴이 아파서 뒤도 못 돌아보고 계속 봤지요. 어린애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하루종일 봤었네요.
쪼그만 놈 앙알앙알 다니는 꼴 보면서 흐뭇하게 웃다가도 가슴 뜨끔해서 주춤하고, 가끔 눈물 쭉 흘리고, 사춘기에도 하지 않던 짓을 다 하면서.
걔가 웃고 화내고 울고 외로워하고 하는 그 모든 순간을 지켜보면서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세요?
행복했으면 좋겠다....
당장 그 인생을 관음하는 내 즐거움은 어찌되든 좋으니까 그냥 걔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매 순간 기도했어요.
그러다가 나중에는 또 걔랑 비슷한 상황에 있는 세상 모든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기도하고.
더더 나중에는 그냥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아이여도, 아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조금이나마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기도하고.
그렇게 제 첫사랑의 범위가 점점 넓어지는 걸 느끼면서 제 세상도 같이 넓어졌어요.
연애할 때의 마음도 분명 사랑은 사랑이었겠지만
제 삶을 이렇게 크게 바꿔 놓은 사랑은 분명 이게 처음이어서
저는 어떤 의미로 이게 제 첫사랑이라고 생각해요.
이 자리를 빌어 제게 이렇게 큰 사랑 가져다 준 여러 선생님들께 감사 인사 올려요.
선생님, 제가 이 편지글을 얼마나 오래 붙들고 있었는지 혹시 짐작이나 하실까요. 한 백 년 붙들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중 일 년은 편지글 적는 데에 썼고 나머지 구십구 년은 이걸 부칠까 말까 고민하는 데에 썼답니다.
지금도 이걸 그대로 부칠까 말까 고민이 많네요.
그래도 지금 이렇게 선생님께서 이걸 읽고 계신 걸 보면 제가 마지막으로 조금 더 용기를 냈나 봐요.
모두 오래도록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 - 신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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