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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서?"
줄 게 있다면서 바른은 주머니에서 접혀진 종이 한 장을 오름에게 건네주고,
그걸 펼쳐본 오름은 서서히 표정이 굳어진다. 버젓이 적혀있는 '사직서'란 세 글자.
"포기하지 않았으면, 그 떄처럼 버텨줬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힘들면, 힘들고 더럽고 치사해서 도저히 못 견디겠으면
뭐 때려쳐요, 그 까짓거. 개뿔 판사가 뭐라고."
"임판사님.."
"나도 같이 갈게요, 어딜 가든."
고개 숙이고 있던 오름은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 눈망울로 바른을 올려다 본다.
"아무래도 우배석이 필요한 것 같아서. 사고뭉치 좌배석한텐."
그 어느 때보다도 진심이 담긴 눈빛이었다. 어느 누가 이 남자를 차가운 원칙주의자라고 말했던가.
아니, 적어도 13년 동안 한 순간도 잊지 못한 그녀 만큼은 예외인건 분명하다.
그녀가 어떤 모습을 하든.
바른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결국 눈물을 흘리는 오름.
그리고 그녀에게 울지말라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손수건을 건네주는 바른.
하지만 눈 앞에 있는 손수건을 굳이 사양하며 오름은 스스로 눈물을 닦는다.
손수건을 건네고 있던 손이 잠시 멈칫하고, 혼자 무안함을 느끼려던 찰나.
오름은 고개를 들어 다시 바른을 제대로 마주본다.
그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미소로 점점 바른에게 다가가는 오름.
그 누가 이 광경을 예상이나 했을까.
햇살이 좋아 유독 푸른 빛으로 가득찬 정독 도서관 앞에서 입을 맞추고 있는 두 사람.
바른은 머리가 새하얘진 채 목석처럼 굳어 가만히 서 있을 뿐이다.
그 누구보다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 한건 이 남자일테니.
눈 감고 입을 맞추던 오름이 눈을 살짝 뜨자 두 사람은 눈이 마주친다.
경직된 채 토끼같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바른이 귀여워 웃음이 나버린 오름.
"묵묵히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아직 늦지 않았다면, 이게 지금 제 대답..이라고 해도 될까요?"
쿵쿵쿵-
옆에 서 있던 오름에게까지 들릴 정도로 크게 뛰는 그의 심장 소리.
정중히 고백 거절당했을 때도 좋아하는 마음은 차마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혹시나 그녀에게 부담이 될까, 더는 욕심내지 않고 그저 옆에서 힘이 되어주고 싶단 생각 뿐이었다.
"어...박판사..그러니까 이게.."
"네, 우리 연애해요! 임판사님."
오름의 입에서 먼저 나올줄이야.
아니, 어쩌면 더더욱 오름이다운걸지도 모르겠다.
바른은 왠지 모를 감정에 휩싸여 오름에게 눈을 뗄 수 없었다.
지금 내 앞에 그녀가 있다.
풋풋했던 사춘기 시절, 날 한 없이 작게 만들더니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난 지금 역시 날 계속해서 되돌아보게 만들고,
어느새부턴 내게 가장 큰 영향력이 되어버린 이 여자.
그녀가 너무도 사랑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바른은 오름을 뚫어져라 바라본 채 한 동안 서 있더니, 보조개 띈 미소를 지으며
그대로 손수건을 들고 있던 손으로 오름의 두 볼을 양쪽으로 살포시 감싼다.
그리고선 오름이 사랑스러워 미치겠단 눈빛으로 말한다.
"늦어도 돼요. 말했잖아요, 어딜 가든 나도 같이 가겠다고."
그리곤 또 한 번 예상치 못한 장면의 연속.
작은 오름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이번엔 바른이 먼저 다가가 입술을 포갠다.
아까의 목석 같은 임바른의 모습이 아니었다.
어느 떄보다도 조심스럽게, 보다 소중하게 오름의 얼굴을 감싼 채.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 전엔 찾아볼 수 없던 그의 거침 없는 모습으로 오름을 압도하는 바른이었다.
그렇게 우리가 보지 못한 그 10분이 지난 후,
끝.